전국적 파업은 불가능하지 않다.




사실, 의사는 단지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큰 공통점이 없다.
출신 학교, 지역 배경, 전문 과목, 연령, 소속 등등으로 쪼개지고 나눠지기 때문에, 동질감이 있을 것 같아도 동질감 만큼이나 이해 관계가 다르고, 갈등이 큰 조직이다.

그래서 이 조직이 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서 거의 불가능하기 까지 하다.

과거의 경험을 보자면, 의약분업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흔히 의사는 의약분업을 반대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약사들의 임의 조제 행위를 근절하자는 취지로 의사 단체에서 의약분업을 더 크게 주장했고, 이 때, 의사들에게 의약분업의 의미는 약사들의 "임의 조제 금지"를 의미했었는데,

의약분업 진행 과정에서, 비교적 동질감이 큰 약사회는 똘똘뭉친 반면, 병원과 의원 간의 갈등, 과간 갈등, 지도부와 민초 의사들의 갈등과, 완전 분업이냐 선택 분업이냐 등등의 반목 끝에 의료계 스스로가 무너져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비슷하다.

의협 집행부는 지리멸렬하고, 리더십에는 큰 결함이 있고, 파업의 명분을 찾지 못해 의사들 은 우왕좌왕하며, 과거와 달리 파업은 실질적 경영난을 크게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전국적 파업은 전혀 쉽지 않다.

그런데,
무얼 생각해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전국적 파업이 의외로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정부에는 "보건의료 위기 대응 매뉴얼"이라는 것이다.
내 기억에 이 메뉴얼은 복지부 주관 하에 국무총리실에서 관장하여 만드는데, 이 매뉴얼에 규정된 우리나라 보건의료 위기 상황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의사 파업, 둘째, 약사 파업, 셋째 혈액 부족.

이 매뉴얼은 해마다 관련 부처 (복지부, 행안부, 지자체, 국방부 등등 관련 기관, 단체 등등)들이 모두 모여 개정 작업을 벌이고,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규정된 매뉴얼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누어 각 기관, 단체들이 대응에 나서게 된다.

이를테면, 약사의 경우 약사들이 지역 파업에 나서면, 그 지역의 의약분업을 해제하고 병의원의 원내 조제를 허용하게 된다.

만일 전국적 파업이 벌어지면, 전국 모든 병의원의 원내 조제를 허용한다.
이렇게 되면, 의약분업은 사라질 수도 있다.

약사들은 이를 알기 때문에, 쉽사리 파업에 나서질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의 파업에 정부가 할 수 있는 대응 방법은 사실 별로 없다.

공공의료기관 (국립 병원, 지방공사 도립병원, 보건소 등)을 풀 가동하고, 공중보건의, 군의관을 동원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약국의 임의 조제를 허용한다는 내용은 없다.

지난 4일 복지부는 보건의료위기 대응 매뉴얼에 따라, 관련 기관, 지자체를 소집해 의사 파업에 따른 대책 회의를 한 것으로 보도 된바 있다.

아마도 파업 방지를 목적으로 지자체 보건소를 통해 의료기관에 업무개시 명령 등에 대한 안내를 했을 것이다.

지금 여론이나 언론은 "과연 전국적 파업이 있겠느냐?"는 의문으로 마치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처럼 이러다 말겠지 하는 뉘앙스의 보도를 하고 있다.

이건, 절반은 맞는데, 절반은 틀린 예측이다.

앞서 말했듯, 의사들은 내부적으로도 이해 관계가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달라, 한 마음 한 뜻으로 전국적 파업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정부가 이 예민한 상황에 불을 지르면, 파업은 봇물처럼 터진다.

만일 정부가 어설픈 대응으로 이슈를 만들어 버리거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수긍 가능한 범위 외의 대책을 하게 되면,

아마도 죽을 각오로 문을 닫을 것이다.

투쟁은 곧 파업이 아니다.

투쟁은 불만의 표시일수도 있고, 협상의 방법일 수도 있다.
파업은 전혀 다르다.

협상력 강화 수단의 파업이 아니라, 감정적 대응의 수단이 될 경우 모래알 같은 의사들은 진흙처럼 뭉칠 수 있다.

바로, 의약분업 파업이 그랬다.

한 날 한 시에 모든 의사들이 병원을 나서고, 문을 닫는 것은 희망 사항이다.

의약분업 파업도 개원의로 시작해서 전공의로 파급되었고, 후에 교수들도 동참했다.

그 때도 파업을 할 것인가, 언제 할 것인가, 얼마나 할 것인가를 두고 숱한 논쟁이 있었고, 반대와 반목이 있었다.

지금 파업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의료계 내부의 시각은, 의사들에게 내재된 불만이 현 의협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에 비해 크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건 무척 해괴한 주장처럼 들려도,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지금 의협 지도부가 오히려 파업의 발목을 잡는 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어설픈 대응으로 그 내재된 불만에 기름을 붓거나, 의협 지도부가 아예 바뀌거나, 아니면 대오각성하고 진정성을 보여주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정부가 착각해서 안되는 것은, 지금 의협 지도부가 유발하는 파업의 동인과, 실제적으로 의사들이 갖는 불만, 저항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다수 의사들이 파업 투쟁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불만은, 현 지도부가 출현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그것에 불길이 당기지 않아 잠재되어 있는 것인데,

현 노 회장 등이 유발시키려는 파업의 동인은 이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만일,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불이 당겨지면 그 땐 전국적 파업이 벌어질 수 있다.

때문에 어설퍼 보이는 후자에 의한 파업 기미에 정부가 똑 같이 어설프게 대응하여, 불똥이 전자의 불만에 옮겨 붙으면 그 땐 말릴 수 없는 파업으로 옮겨 붙게 된다는 것이다.

의사 파업에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는 지자체들의 보건소 직원 전화 돌리기 따위가 바로 어설픈 대응의 하나이다. 보건소 직원이 개원의에게 전화를 돌려 갑질한다고 의사들이 꼬랑지 내릴 것으로 생각하나?

전국적 파업이 투쟁 성공이나 의료계의 목적 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수 많은 이들이 다치고, 상처받고, 몰락하게 될 수 있으며, 국민적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국력 소모 역시 매우 클 것이다.

파업이 옳으냐, 아니냐는 부질없는 논쟁이다.
게다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더 더욱 의미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이유들로, 정부가 의료계 파업 조짐을 평가절하하거나 아마츄어적 대응을 할 경우, 모두가 피를 볼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정부는 진정성을 가지고 의사들의 불만을 직접 들으려 나서야 한다. 오로지 그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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