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로 산다는 것




몇 가지 것들이 자꾸 오버랩된다.

하나는, 2011년 작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란 영화이다.

알츠하이머 치료를 목적으로 손상된 뇌조직을 치료하는 유전자 조작 바이러스를 주사 맞은 침팬지 새끼로 태어난 '시저'의 이야기이다.

어미가 맞은 바이러스 주사 탓에 시저는 날이 갈수록 지능이 높아지게 된다.
5살 쯤 되면서, 시저는 인간의 청소년기 때 보이는 '자아의 발견, 자아에 대한 의문'에 빠지게 된다.

늘 자동차 트렁크에 타고 공원에 가던 그가, 어느 덧 이를 거부하고 자동차 뒷 자리에 앉고, 목줄을 거부한다.

자신을 아끼던 치매 걸린 할아버지를 보호하려다가 동물 보호소에 갇힌 후에는 자아에 대한 의문이 반항과 저항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 그에게 "동료 침팬지"들은 모자란 짐승일 뿐이다.
그들에게 질서와 복종을 가르치고, 더 강력하게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 바이러스를 투입하여 지능을 부여한 후 혁명을 꾀한다.



지능이 생긴 동료들은 "협조"와 "희생"도 깨닳는다.

두 번째 오버랩 되는 것은 역시 영화이다.
실화 소설을 영화 한 것으로 한국에서 "노예 12년"이란 이름으로 개봉된 작품이다.

"자유인"으로 가족과 단란하게 살던 흑인 솔로몬은 유인 납치되어 "노예"로 팔린다.
이름도 강제로 ‘플랫’으로 바뀐다.

영화는 노예들의 울음과 음악이 잔인하게 가슴을 후벼 파고 드는데, 사실 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건, ‘노예’들의 타성에 젖은 태도, 행동, 모습 들이다.




플랫 (솔로몬)이 목이 매달린 체 간신히 뒤꿈치를 들고 숨을 연명하는 가운데 무심히 주위를 돌아다니는 다른 노예들, 죽어가는 그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뛰어 노는 아이들.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하고, 봐도 못 본 척해야 하는 노예들.
저항하지 못하는 검둥이들은 지능을 가진 침팬지보다 훨씬 더 짐승과 흡사하다.

더 무서운 건, 자유인도 노예로 규정되면 노예의 사고와 생각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는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12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을 해야 했을까?

자기를 돈 주고 산 농장주인에게 ‘나는 자유인이며, 당신이 나를 위해 지불한 돈을 지불할 테니 나를 놓아달라’고 말하지 못한 걸까?

구타와 폭행? 살해당할 위험 때문에?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한국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염전 노예”이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임금도 받지 못한 체 동물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아가며 염전에서 일을 한다.
그들은 자유인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과 같이 유인 납치되어 저항하지 못하며 노예 생활을 했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재민”을 부르짖는 이 나라에서 엄연히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염전에만 노예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 자그마치 1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
대학 교수에 박사에 선생님으로 칭송되는 그들.




경제적으로도 남들보다 못하지 않으며, 배운 것도 많고, 나름 전문가로 분류되는 그들도, 사실은 법과 규제와 강력한 국가 통제 속에서, ‘시저’보다 못하고, ‘플랫’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염전 노예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건 자기비하나 선동이 아닌 사실이다.

시장경제를 추구하며, 자유 경쟁이 산업 성장의 동력이라고 믿는 이 나라에서,
오로지 건보 만은 예외이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건보제도의 강제지정제 하에서는 노예이다.

더 이상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

우리가 주장하는 오로지 이것이다.

노예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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