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가장 큰 소나무는 한 그루 뿐이다














의료분쟁조정법에는 이른바 '형사처벌 특례' 조항이 있는데, 형사처벌 특례의 적용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조정이 성공하는 경우 (즉, 피해자가 조정을 받아들이는 경우)
2.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
3. 피해자가 사망한 것이 아닌 경우


또, 4번째 조건이 있는데, 사망 뿐 아니라, 중상해의 경우에도 특례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이 말하는 중상해는 "생명에 대한 위험이 발생하거나 장애 또는 불치나 난치의 질병에 이르게 된 경우"이다.

이 법을 만들 당시, 의료계는 형사처벌 특례의 기준이 상해 정도가 아니라 과실 정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가벼운 과실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형사처벌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입법자는 다른 법과의 형평성을 들어 상해 정도를 기준으로 입법했다. 다시말해 아무리 가벼운 실수를 하여도 사망하거나 장애 등이 발생하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법은 분쟁조정에 관한 법이므로 이 법이 의사들의 형사처벌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법 기관, 정부가 갖는 의료사고에 대한 시각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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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법 체계에서 의사가 교도소 담 위를 걷는다는 건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매우 질기기도 하지만, 어이없이 끊어지기도 한다.

사람은 공장에서 일괄 생산된 공산품이 아니며, '대체로 비슷'할 뿐 제각각 다르다. 즉, 대한민국에 5천만명이 있다면, 5천만 가지 다른 특성과 기전을 갖는 개체가 존재하는 것이며, 하나의 프로토콜이 적용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의술이 기술이 아니라 예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사들은 '대체로 비슷'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진단하고 치료할 뿐이다.

환자만 다를 뿐 아니라, 의사들의 진료 여건, 환경도 제각각이며, 의사들의 경험, 수준, 지식의 차이도 천차만별이다. 의사도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의를 취득하면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진료하고, 모든 환자에게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다.

"고든 렘지 레시피 줄 테니까 고든 렘지와 똑같은 요리를 만들어 내." 라고 하면 모든 식당, 요리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다.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공부하는데 귀신 같은 아이들을 뽑아 적어도 6년 이상 독하게 공부를 시키고, 매 학년 강력한 경쟁을 통해, 실력이 떨어지면 가차없이 낙방시켜버리고, 의사고시,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시험 등으로 거르고 걸러 의사를 길러내지만, 레시피 만으로 최고의 음식을 만들 수 없듯이, 교과서에서 배운 것만으로 경험없이 모든 환자를 다 성공적으로 진료하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경험은 선배 의사를 통해 얻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큰 스승은 바로 환자이다. 환자를 통해 배우고, 경험을 쌓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 오진은 필연적이다.

많은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요리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크고 작은 실수를 통해 보다 능력있는 의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잘 하는 의사에게 가면 되지 않을까?

남산에 가장 큰 소나무는 한 그루 뿐이듯, 어떤 수술을 가장 잘 하는 의사도 단 한 명 뿐이고, 어떤 질환을 가장 잘 찾아내고 진단할 의사, 그 질환에 대해 가장 경험 많은 의사도 단 한 명 뿐이다.

그 한 명의 의사가 모든 국민을 다 진단하고 수술할 수는 없다.

이게 현실이다.

그래서 누군 경험이 좀 적고, 진료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한다.

이 역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그러나 법적 판단은 가장 큰 소나무를 기준으로 하여 처벌한다. 이런 부조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일 의사의 과실이 증명되면, 사법부는 그 의사의 역량과 진료 당시의 환경, 가용할 수 있는 진단 기기들등을 모두 감안해야 한다.

의업에 들어선지 고작 3개월된 의사의 행위를 30년 된 최고의 소나무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 않은 검사를 놓고, 왜 그 때 이런 검사를 하지 않아 놓쳤으냐고 처벌해도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모든 의사는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의료 사고를 낸 의사를 형사처벌하기보다는 재교육하는데 힘 쓴다.

누군가는 능력이 안돼 "진료할 수 없으면 보내라!" 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 이게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들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전국의 모든 의료기관이 적극적으로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사태가 초래될지도 고민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큰 소나무는 한 그루 뿐이다. 모든 환자가 단 한 그루 소나무의 그늘 아래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런 환자 전달 시스템 즉,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도 않으며, 가동 되지도 않는다.

때문에, 무작정 "진단할 수 없으면 보내라!"는 건 답이 아니다.

결국, 이런 판결은 의사에게 방어 진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국민들에게 방어 진료의 피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렇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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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조
① 의료사고로 인하여 「형법」 제268조의 죄 중 업무상과실치상죄를 범한 보건의료인에 대하여는 (중략)조정절차 중 합의로 조정조서가 작성된 경우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다만, 피해자가 신체의 상해로 인하여 생명에 대한 위험이 발생하거나 장애 또는 불치나 난치의 질병에 이르게 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2018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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