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징용과 대법원 판결에 대해










징용은 뭘까?

우리는 "강제 징용"이란 단어를 볼 때, 아프리카 노예를 상상한다.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사냥해 목에 쇠사슬을 걸고, 노예선에 싣고 와 노예로 부리는 걸 생각한다.

그러나 징용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징용(徵用)은 전시나 천재지변 등 유사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여 노역을 강제하는 행위이다.

징용은 사유재산을 차출하는 '징발'과 민간인에게 병역을 부과하는 '징병'과 함께 대표적 국민 동원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징용은 강제 혹은 의무적 노동(forced or compulsory labour)을 의미하므로, 이미 '강제성'이 부여된 단어이어서, "강제 징용"은 '역전앞, 족발, 철교다리, 모래사장'과 같은, 강제성에 방점을 찍고 싶어 붙이는 첩어에 불과하다.

왜냐면 강제성이 없는 징용은 없으니까.

참고로, 국제 사회는 국제 노동 기구(ILO)를 통해 징용과 같은 강제 노동의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1년 ILO에 가입했으나, ILO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왜냐면, ILO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여전히 "강제" 징용을 시행 중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중보건의이다. 공중보건의는 병역 대신 공중보건의로 강제 노역해야 한다. (나도 공보의를 했으므로 39개월간 "강제 징용" 당했다)

징병은 징용이 아니지만, 징병 대신 강제 혹은 의무적 노동을 강요하면 이는 징용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의무경찰, 의무소방, 사회복무요원 등도 모두 강제 징용당하고 있는 셈이다.

ILO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국가로는 미국과 중국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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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 말하지만, 우리는 흔히 일제 시대 징용에 언급할 때, 아프리카 노예를 상상한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1) '강제' 징용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1945년 해방까지 35년간 꾸준히 이루어졌다.

2) '강제' 징용은 그 대상자를 무작위로 유인, 납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강제로 끌고가 이루어졌다.

3) '강제' 징용자는 노예와 같아 노임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런 오해를 가지고 있다.

과연 그럴까?


1. 징용의 시기


일제는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발효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39년 법 제 4조와 6조에 따른 ‘국민징용령’이 발효된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으로서는 국운을 건 전쟁 시기인 셈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징용은 전쟁같은 유사시의 강제 국민 동원 수단이다.

그러나, 징용은 노예를 부리는 것이 아니므로 급여를 제공한다. 국가총동원법 6조는 피징용자의 사용, 급여와 임금, 조건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국민징용령은 일본 내지(본토)에 대해서만 적용되었을 뿐이다. '내선일체'를 강조하던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는 시행을 연기하고, 민간 기업이 모집을 통해 노동력을 조달키로 했다.

국민징용령이 한반도에 적용된 건 1944년 10월부터이며, 이때부터 사실상 징용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징용은 엄밀하게 1944년 10월부터 1945년 8월 사이에 10 개월에 걸쳐 발생했다. 또 이 징용은 마구잡이가 아니라, 법에 따라 영장 발부로 이루어졌다.

물론 모든 징용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어디에나 간악한 무리는 있기 마련이고, 이를 기회삼아 적 (혹은 미운 놈 등) 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거나(삼청교육대 시절에도 그랬다) 무지몽매한 사람을 팔아 넘겨 이득을 취할 기회로 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건 조선 땅에서 생긴 일이며, 조선인이 개입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2. 피 징용자의 선발 방식


1920년대 일제는 자국 노동자의 실업을 막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유입을 억제하였으나,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내 노동력 수요가 늘자 정책을 전환해 조선인 인력의 일본 유입을 적극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39년 7월 ‘노무동원계획’을 짜고 1939년 1차로 5만명이 넘는 조선인을 일본으로 불러들이기로 한다.

과정은 이랬다.

조선인 노동자가 필요한 일본 민간 기업이 필요인원을 후생성에 요청하면, 후생성이 이를 취합해 조선총독부에 통보하고, 총독부는 각 지역을 기업에 할당하고 기업이 그 지역 내에서 인원을 직접 ‘모집’했다.

이때의 모집은 ‘노동력을 제공하면 급여를 주겠다’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집 방식으로는 계획 인원을 충당하기 어려워, 지역 경찰, 행정 기관이 나섰다. 즉, 면장, 순사 등이 나서 권유,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차 모집 방식은 매우 비효율적이어서 1940년부터 총독부는 ‘조선노무협회’를 만들어 이 협회가 각 지역에 필요 인원을 할당한 후 관 주도로 모집에 나섰다. 사실상 관 알선 방식이며, 좀 더 강제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제화한다 해도 강제로 끌고 갈 법적 근거는 없었다. 여전히 국민징용령은 조선 반도에서는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40년 '조선 공장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을 발표한다. '내지'는 일본열도를 말한다.

이에는 “노동자의 조선에 대한 출국 여비 및 귀향 여비는 고용주가 부담”하도록 하고, “고용주는 조선의 기술 향상을 목적으로 필요한 지식, 기능을 가르쳐야” 하며, “고용주는 덕을 길러야”하며, “고용 기간은 5 년 이내”라는 조건이 있었다.

일본 내각은 1944년 8월 8일 국민징용령이 면제된 조선에서도 1944년 9월부터 국민징용령을 발동하겠다고 결의한다.

모집 방식이 관 알선 방식을 거쳐 징용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징용은 영장 발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같은 방식의 '강제적' 징용은 이미 일본 내에서는 일본인을 상대로1939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생각하면 당시 조선인은 조선계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합병된지 30년이 넘었고,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여권을 가지고 출국해야 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내선일체를 강조했고, 조선을 일본 법률로 다스렸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지만, 일본 정부 시각에서 보면, 조선인은 일본국의 지배를 받는 일본 식민이었고, 전쟁과 같은 유사시 식민을 동원하는 것, 즉 징용은 그들의 시각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도 징용되거나 위안부로 차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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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문제가 된 대법원 판결은 일제 시대에 노무공으로 일본에 가서 일을 한 사람 셋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한 것에 대한 판결이다.

(위 첨부 사진은 모두 대법원 판결문에서 캡쳐한 것들이다)

즉, 이들은 일본에 가서 노동을 했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 기업으로부터 노임을 지불받지 못하고 귀국했으니 그 노임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미지급 임금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강제동원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이들은 강제 동원되었을까?

원고 2 는 1943년 평양에서 공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한 후 면접을 보고 합격해 일본제철에 훈련공으로 노역에 종사했다.

원고 3 은1941년 대전 시장의 추천을 받아 보국대로 동원되어 일본제철에서 노역에 종사했다.

원고 4 는 1943년 1월, 군산시의 지시에 따른 모집에서 모집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제철에서 선로 신호소에 배치되어 일을 했다.

(사진 참조)

손배소를 제기한 사람은 위 3 명이다.

이들은 강제 징용된 걸까?

위의 원고 3명은 각각 41년, 43년에 모집되어 일본에 건너갔다. 즉, 징용이 시작되기 전이다.

그런데 강제 동원에 대한 위자료 청구라는 건 사실 이해가 어렵다.

불법적으로 징용되어 노동력을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면, 이 소송은 기각되어야 한다.

왜냐면,
- 전후 샌프란시스코 협약,
-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 등 그 부속 협약,
- 이후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
-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
-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등에 따라 일본국 또는 일본 기업으로부터 지급받지 못한 급료 등을 일본 기업이나, 일본 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지급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이 많은 법들을 만든 이유는 명확하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약속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일괄 수령하고, 한국 정부가 일본국이나 일본 기업을 대신해 배상하기로 했기 때문이며, 이것으로 양국의 청구권 문제는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원고들의 손을 들어 준 건, '불법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도 불법이고, 따라서 조선인들의 징용 또한 불법이며, 따라서 미지급된 급여가 아니라 불법 행위에 대한 위자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대법원 판결의 해석이 불가하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다...

어찌 엄존한 역사를 이 한 줄로 퉁치고 갈 수 있을까.



2019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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