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율 100%의 그림자

 



우리나라 좌파 사회주의 시민단체들은 건보 보장율을 100%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문 케어의 핵심도 건강보험의 보장율을 급진적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보장율을 높이면 비급여 항목이 줄어들고,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이 줄게 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환영할 일이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보장율 100%를 달성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문제가 있을까?

첫째, 민간 의료기관의 몰락

우리나라는 건보 체계 하에서 의료 공급의 90% 이상을 민간 의료기관을 담당하고 있다.
민간 의료기관은 설립자 혹은 개설자가 개인이나 민간 기관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10%는 국가가 설립한 국립 병원 등 국공립병원이 부담하고 있다.
민간 의료기관이든 국공립 공공 병원이든 개설 주체의 차이만 있을 뿐 건강보험 제도하에서 운영되는 방식은 동일하다. 즉, 동일한 서비스에는 동일한 가격이 적용된다.
차이가 있다면, 민간 병원은 경영 부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공공 병원은 개설 주체가 일부 부담한다는 것이다. 즉, 국공립 병원이 적자를 내면 개설 주체가 적자를 보존해 준다. 국가와 지자체가 부담하는 적자 분은 결국 국민 세금이다.
이렇게 건보제도는 사회주의적 공보험제도이지만, 병원 경영은 자본주의적 경쟁 시스템이라는 모순을 지닌다.
게다가 서비스에 대한 가격 즉, 의료수가는 국가가 정한 획일적 수가를 따를 수 밖에 없을 뿐 아니라, 그 가격은 원가에도 미치지 않는다.
과거 심평원은 의료서비스의 수가가 원가 수준의 70%에 불과하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서비스 원가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며, 이 발표는 이미 10년이 훌쩍 넘은 것이라 물론 이 수치를 지금도 똑같이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 의료 수가는 형편없이 낮다는 것이다.
수가가 낮다 높다는 결국 상대 비교이므로 글로벌 사회에서는 타국의 행위 수가와 비교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나라 수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낮다는 건 이미 상식이 되어 버렸다.
즉, 동일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때, 한국 의사나 병원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상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병의원을 쥐어 짜고 있는 것이다.
겨우 숨통을 터주고 있는 것이 비급여 항목이었다.
정부도 병원들이 급여 항목에서 적자를 보고, 비급여로 적자를 보존하여 왔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보장율을 100%로 끌어올리면 당연히 거의 모든 병원이 적자로 전환할 수 밖에 없다. 왜냐면, 비급여를 급여로 전환할 때 정부는 관행 수가(비급여로 받던 수가)의 50% 혹은 그 이하로 가격을 후려쳐 급여화하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행위가 비급여였을 때 100을 받다가 50% 이하로 줄어드니 병원은 반발할 수 밖에 없고, 의료계가 급진적 문 케어를 반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문 케어는 비급여를 급여로 전환할 뿐 그래서 생기는 적자분을 보존해 줄 생각이 없다. 병원은 인력 싸움이기 때문에 지출분의 40% 가량이 인건비이다. 결국 정부는 인건비를 줄여 적자를 보존하라는 것이다.
보장율을 100%로 끌어올리면 인건비 감축으로는 병원 경영이 불가능하다. 시설 개보수, 재투자는 불가능해지고, 병원 서비스, 의료의 질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영국 중부 스태퍼드(Stafford)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NHS의 과도한 부담을 줄이겠다며 간호사 등 직원을 해고하자, 거동을 못하는 환자가 침대에서 그대로 용변을 봐야 했고 몇 주 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다. 화장실 청소가 안 돼 환자나 가족들이 손수 청소를 하고 피가 말라붙은 붕대를 직접 갈아야 했다.
환자 가족이 환자의 약 관리부터 치료와 검사를 위한 이동도 책임져야 했고, 마실 물이 없어 환자가 화병의 물을 마셔야 했다.
제일 기가 막힌 일은 자격이 없는 응급실 안내원이 환자 상태를 보고 치료 완급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린이 환자의 심장박동 모니터 기계를 관리하기 귀찮다고 전원을 뺄 정도였다.
그 결과 2005년부터 2008년 사이 400명~1200명의 환자가 영국 언론 표현대로 ‘필요없이(needless)’ 사망 했다.
마른 수건 짜듯 병원을 쥐어 짜면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


둘째, 국민의 저항

보장율 100% 는 국민이 결코 감내할 수 없다.
비급여를 급여로 전환하면 개개인이 부담하던 걸, 건보 재정에서 부담해야 하므로,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이 악화되어 건보 보험료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오를까?
막연히 추측하면, 현재의 두 배는 부담해야 한다.
보험료 인상은 국민 개개인이나 가계 부담만 늘어나게 하는 게 아니다.
직장보험료는 그 절반은 직장에서 부담하므로 보험료가 오르면 기업과 사업자 부담이 커진다. 결국 기업 채산성은 악화되고 대외 경쟁력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게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보장율 100%가 되면, 의료 서비스 이용의 제한은 커질 수 밖에 없다.
건강보험 재정은 전형적인 공공재이며, 제한한 재정이 효율적으로 이용되도록 하여야 한다. 건강보험은 사회 보험이며 국민들이 세금과 별도로 내는 보험료로 운영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 NHS 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NHS로 운영되는 영국이나 캐나다처럼 의료 이용에 제한이 걸린다. 이들 나라는 별도의 비용없이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지만, 이용의 제한을 받고, 많이 기다려야 한다. 치료를 안 해주는 게 아니라, 많이 기다려야 해 준다는 것이다. 기다리다 악화되거나 죽는 건? 어쩔 수 없다.
즉, 의료 접근성이 의도적으로 악화된다.
이제까지 정부의 기조는 어떻게든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을 짜는 것이었는데, 접근성이 높아지면 의료기관 이용율이 올라가고 건보 재정 부담은 더 커지게 된다.
가격 접근성이 극대화되므로, 다른 접근성에 장벽을 칠 수 밖에 없다. 외국의 경우 그 대표적인 것이 주치의 제도이다.
주치의는 상상처럼 나와 내 가족의 건강 상태를 모두 알고 늘 옆에서 건강을 챙겨주는 건강 지킴이가 아니라, 나의 의료 이용을 결정하고 제한을 거는 걸림돌인 것이다.
보장율 100%가 되면 주치의 제도는 필연적으로 도입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주치의는 전문의가 아니며, 환자는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주치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물론 주치의도 아무 때나 가서 만날 수 없다.
참고로 2010년 기준 국내 의사의 80% 이상이 전문의이며, 의대 졸업생의 90%가 수련을 받고 전문의가 된다. 이는 매우 왜곡된 형태로, 정부는 이미 2013년부터 전문의를 줄이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이후 6년간 10% 가량의 전문의 배출을 줄였고, 앞으로도 줄어나갈 계획이다. 전문의를 줄이는 건 미래에 다가올(?) 주치의 제도에 대한 대비라고 볼 수도 있다.
영국이나 캐나다 등에서는 주치의를 만나기 위해 별도로 예약을 하고 기다려야 하고, 전문의를 만나려면 주치의의 허락 하에 또 다시 예약하고 기다려야 하며, 전문의가 수술을 결정하거나 암치료를 결정하면 이를 또 기다려 받아야 한다.
당연히 감기나 장염과 같은 가벼운 질병으로는 병원을 이용할 수 없다. 이걸 한국 국민들이 견딜 수 있을까?
좌파 시민단체들은 주치의 제도 도입을 늘 부르짖었지만, 이건 주치의 제도의 한쪽 면만 보고 주장하거나 단지 구호일 가능성이 크다.
보장율 100% 를 다른 말로 무상의료라고도 부른다.
무상의료 실현은 주치의 제도 도입과 더불어 좌파들의 구호이며, 이 정권의 기조이기도 하다.
'무상' 과 '주치의'는 착각을 일으키는 용어이다.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 누군가는 또, 어떤 식으로든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공공의대를 만든다고, 의사 정원 늘려 의사를 대폭 늘린다고, 이들이 그 비용을 감당하지는 않는다.
의대생들의 국시 거부를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각에서는 4학년들의 국시 거부로 내년 인턴, 공보의, 군의관 확보만 걱정하지만 이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대책없이 거부하는게 아니다. 지금 의대생 정도의 학업 능력이면 굳이 의사가 되지 않아도 어느 영역에서든 경쟁력을 가지고 잘 할 수 있다.
1년을 미뤄 내년에 의사 면허를 받고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릴 수도 있다. 10대 경제국가 중에 우리나라처럼 의사를 취급하는 나라는 없다. 전세계적으로 의사는 공급이 부족한 직종이다.
지금 의대생들은 영어를 못하거나 외국 생활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4학년이 그렇게 한다면, 3학년이나 2학년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미 그들의 눈에 한국 의료의 몰락이 보이는데 자기 인생을 거기에 걸 수는 없을 것이다.
병원도 마찬가지이다.
계속 병의원을 쥐어 짜면, 병원을 안 하면 죽는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면 신규 병원 개설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돈으로 다른 데 투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현존하는 병원도 닫을 수 있다. 이미 병의원은 폐업율이 매우 높은 업종이다.
병원을 할수록 적자가 누적되고 경영 압박으로 죽을 것 같다면 빨리 포기하는 게 낫다.
사실 이게 정부나 건보가 원하는 바인지도 모른다. NHS 국가들이 응급실을 닫고, 장비를 철거하며 중환자실을 폐쇄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정부는 '우리는 그래도 무상으로 치료해 준다'고 주장할 뿐이다.
우리나라 의료가 그 패턴을 따라갈 가능성은 매우 크다.
대한민국 건보 제도는 40년이 훌쩍 넘었고, 그때 그때 땜빵하며 누더기처럼 기워 온 낡고 비효율적이며 모순 덩어리의 제도이다.
1977년 (의료보험 도입)이나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의 경제 상황, 국민 소득 수준과 의료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금의 제도를 운영할 수 없다.
건보 제도와 의료 제도의 혁신이 필요한 이유이다.
의료는 국방과 더불어 국민의 안전과 생명과 관한 가장 중요한 사회 제도이며 결코 누군가의 이익이나 정치적 이유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의사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2020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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