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의료 수가는 왜 쌀까?
동일 의료 행위에 대한 우리나라 의료 수가가 해외 주요국에 비해 1/5 ~ 1/10 에 불과하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왜 우리나라 의료 수가는 이렇게 저렴할까?
1. 수가 결정 구조의 문제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명목상 국가가 직접 통제하지 않는 사회보험의 형태로 되어 있다. 때문에 수가는 원칙적으로 공급자 (의과 치과 한의과 및 간협, 약사회 등) 각 단체와 보험자인 건강보험공단의 합의로 결정된다.
이렇게 보면 참 합리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건보공단은 사실 보건복지부의 관리 하에 있으며, 수가, 급여 항목, 보험율 등 주요 사항은 정부 정책 기조를 따를 수 밖에 없으며, 정부 통제 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가 결정 구조만 놓고 보자.
우선 공단에는 가입자 단체들로만 구성된 재정운영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사실상 전국민이 건보 가입자이지만 주로 노조, 시민단체 등을 주축으로 대표를 구성)
이 재정운영위는 수가 협상 전 내년도 재정 증가분 총액을 미리 정하고 그 증가분 내에서만 인상 협상을 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이렇게 늘어나는 재정 증가분은 고작 2~3 %에 불과하다.
그러면 의협 (개원의를 대표), 병협 (병원을 대표), 치협, 한의협, 간협, 조산사 협회 등 각 공급자 단체들은 이 파이 내에서 서로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치열한 협상을 전개한다.
그런데 의협과 병협을 제외한 나머지 단체들이 건보 재정에 차지하는 비율은 적기 떄문에 의협이나 병협의 인상율 1%와 그외 단체들의 1%는 비교할 수가 없다.
결국, 공단은 의협과 병협을 제외한 다른 단체들에게는 비교적 후한 인상율을 줘도 재정 부담이 적어 협상을 빨리 끝낼 수 있지만, 의병협은 결국 인상율 합의를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합의가 불발되면 수가 계약은 건정심으로 넘겨진다.
건강보험법에 따라 가입자 대표, 공급자 대표, 공익대표로 각각 8 명의 위원이 참석해 도합 24 명으로 이루어진 협의체가 있는데, 이 협의체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라고 하며, 이 기구는 보험료 인상율, 급여 항목 (보험을 해주는 항목) 지정 등 건강보험의 주요 사항을 의결한다.
수가 계약이 불발되면, 건정심에서 협의 혹은 표결을 통해 수가 인상율 (혹은 인하율)을 정한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우선, 재정운영위는 수가 협상결렬의 책임을 공급자 단체에 물어 페널티를 적용한다. 즉, 건보공단이 최종 제시한 인상율보다 낮은 인상율로 계약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가입자 단체로 구성된 재정운영위 위원은 그대로 가입자 대표 건정심 위원으로 참석하므로 이 원칙을 고수한다. 현재 가입자 단체는 노조 (2인), 환자단체와 시민단체 대표 등등이다.
공급자 위원 8 명은 의협 2인, 병협 1인, 치협 1인, 한의협 1인, 간협 1인, 약사회 1인, 제약협회 1인으로 구성되는데 만일 의협이 수가 계약에 실패하면, 2:22 와 싸워야 하는 꼴이 된다. 왜냐면 공급자 다른 단체가 의협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또, 공익대표로 참여하는 8인은 중간 입장에서 중재할 것 같지만 그 구성을 보면 이렇다.
즉, 중앙부처 2인 (보건복지부와 기재부), 보험자 대표 2인 (건강보험공단, 심평원), 학계 대표 2인 (보건대 교수 2인), 정부 산하 연구소 2인 (조세재정연구원, 보건사회연구원) 이 현재 그 구성이다.
이 8인 중 의료계 실상을 아는 복지부 대표와 보사연은 오히려 수가 인상을 적극 반대하지 않지만, 나머지는 공급자 편을 들지 않는다.
이러니 매년 수가 인상율은 1~3%을 기어 간다.
일방적으로 아무 근거없이 증가분을 미리 정해놓고, 이에 맞춰 계약하지 않으면, 사자 우리에 던져 놓고, 알아서 계약을 하라고 종용하는 꼴이다. 이게 합리적이고 공정한가?
게다가 필요에 따라 수술 수가나 진찰료 등 특정 항목만 인상하는 것도 어렵다.
왜냐면 통칭 수가 협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환산지수" 계약을 하는 건데, 수가는 "환산지수 X 상대가치 점수"이기 때문이다.
상대가치 점수란, 각 급여 항목의 난이도 등등을 고려해 점수를 매겨 놓은 것으로 특정 수가만 올리려면, 그 항목의 상대가치 점수를 올려야 하는데, 가입지와 공단은 "상대가치 점수 총점 고정의 원칙"을 내세운다.
즉, 특정 수술이나 항목의 수가를 올리기 위해 그 항목의 상대가치 점수를 올리려면 다른 항목에 점수를 빼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심장 수술의 상대가치 점수를 올리려면, 맹장 수술이나 편도선 수술의 상대가치 점수를 빼와야 하는 꼴이다. 흉부외과 수술 수가를 올려주겠다고 외과 수술 수가를 깎자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또, 우리나라 수가 체계 중 가장 고질적인 건, 지나치게 낮은 진찰료이다. 진찰료가 너무 낮아 진찰료에 주로 의존하는 개원가는 날이 갈수록 몰락하고, 가격이 너무 싸서 이용 빈도가 지나치게 높고, 낮은 진찰료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행위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찰료만 인상하면 "상대가치 점수 총점 고정" 이라는 허무맹랑한 원칙 때문에 다른 항목에서 점수를 뺴와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기게 된다. 물론 어찌어찌 의료계가 합의한다 한들 건정심이 이를 동의할 리도 없다.
수가 인상 요인에 따르지 않고 재정운영위가 미리 파이를 정해 계약하게 하는 것, 협상 불발의 책임을 오로지 공급자 단체에게만 부여하여 페널티를 적용하는 것, 재정 중립, 상대가치 점수 총점 고정 등을 내세우며, 수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계속 공급자를 압박하는 등의 이 같은 수가 결정 구조는 결국 재앙이 될 것이다.
그 재앙은 의료 공급 구조의 붕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 공급이 붕괴되거나 계속 왜곡되면 재앙은 회색 코뿔소(Grey RhIno) 처럼 성큼성큼 다가올 것은 분명하다.
재앙이 올 것이 뻔하지만 다들 외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의료계는 줄곧 건정심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왜 수가는 낮았던가?
우리나라 수가가 주요국 수가에 비해 턱없이 낮은 이유는 수가 결정 구조에만 있지 않다. 애당초 시작부터 지나치게 낮은 수가로 시작한 것이 그 이유이다.
우리나라 의료 보험이 처음 도입한 시기는 1977년이다.
그 전에는 의료비를 어떻게 책정했을까?
국가 의료보험이 없었던 시기에는 각 의료기관은 알아서 가격을 정해 받았다. 이를 통칭 '관행 수가'라고 한다.
정부가 가격을 고시하지 않았지만, 각 병의원은 비슷한 가격을 적당히 받았다. 설렁탕이나 해장국, 짜장면의 가격을 고시하지 않아도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환자 입장에서는 현재와 같은 보험 제도보다는 월등히 가격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벼운 감기나 배탈은 약국에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는 환자의 경제 수준을 고려해 덜 받거나 아예 받지 않을 정도로 의사들의 경제 수준이 좋았다. 그러니 당연히 의사는 존경받는 직종이기도 했다.
77년 500인 이상의 사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 제도가 시작되었고, 79년에는 공무원과 사립교원을 포함했으며, 88년에는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해 나갔고, 89년 비로소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의료보험 도입 당시 의료계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77년 의료보험 도입 시에는 비보험 환자 비율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의료 수가를 관행수가에 비해 턱없이 낮게 책정한 것이다.
아마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는 배경이 있는데, 사실 의료보험 도입은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70년대 초부터 의사 출신 국회의원 등이 정부 인사들과 모여 "보건의료발전위원회"를 조직해 의료보험 도입을 모색하여 연구 조사를 한 끝에, 이를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보험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즉, 의사들이 자발적, 주도적으로 국가 의료보험을 도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높은 수가로 보험 체계를 만들 수 없었다. 수가가 높으면 이에 맞춰 보험료도 높아야 하는데, 의료보험 가입의 저항이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험 제도를 만들자는 건 의사들의 선한 의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89년 전국민의료보험으로 확대되고, 2000년 의약분업이 이루어지고,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139개 조합이 통합된 단일 보험 체계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설립되었다.
이처럼 수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77년 책정된 수가는 40년 넘는 세월 동안 큰 변화없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제대로 끼지 못한 체로 시간을 보낸 것이다.
77년 우리나라 1인당 GDP 는 겨우 1천 달러였다. 2018년 1인당 GDP 는 31,363 달러로 31 배가 증가했다.
77년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해였다. 2018년 우리나라 수출 규모는 6,054억7000만 달러로 60 배 넘게 증가해, 이젠 수출 대국이 되었다.
의료보험이 만들어졌을 때의 경제 수준과 국민들의 소득 수준은 지금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변함이 없는 건 의료 수가 뿐이다.
제도의 가장 주요한 배경, 즉 경제적 요인이 바뀌면 제도도 바뀌어야 맞다.
3. 왜 첩약 급여를 반대하나?
건강보험(의료보험)은 가입자, 공급자, 보험자라는 세 다리를 가진 솥과 같다.
지금까지 이 솥이 엎어지지 않은 건 누가 뭐라해도 공급자들이 희생을 치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고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세 다리 중 하나가 부러지면 솥은 엎어질 수 밖에 없다.
지금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4~50대 의사들 중, 89년 전국민의료보험 도입 이전울 경험한 세대는 이제 거의 없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헌신하며 열악한 환경에서 '의노'라고 자조하며 산 세대들이다.
이들의 자조와 불만도 한계에 이르렀다.
이번 시위의 주동이 되었던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모두 90년도 이후에 출생한 이들이며, 이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4~50대 선배들처럼 불합리한 수가와 수가 결정구조를 견딜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들처럼 자조하고 체념하며 살지도 않을 것이다.
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 정책에 이들이 크게 반발하는 건 이유가 있다. 젊은 의사들을 짐짝처럼 던져지고, 때리는 데로 맞고 산 지금의 중년 의사들로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또 다른 노예로 길들이든지, 저항을 맞이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열의 열은 모두 '결국 수가 올려달라는 얘기냐?'고 반문한다.
아니다. 지금의 왜곡된 의료 소비 형태, 과소비되는 의료를 바로 잡고 제대로 쓰기만 해도 전체 건보 재정을 더 늘리지 않고도 한동안 견딜 수 있다.
한 마디로 건보 재정의 효율적 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많이 나아질 수 있다.
의사들이 첩약 급여를 반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효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는 행위에 건보 재정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첩약 급여로 소요되는 건보 재정은 시험 사업동안 해마다 500억원 씩 3년간 1500억원 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70조의 재정 규모에서 일년에 5백억 쓰는데 뭐 대수냐 싶겠지만, 시험 사업은 본 사업으로 이어질 것이며, 건보공단의 의뢰로 작성된 보고서를 보면 12개 질환에 대한 첩약을 급여화할 경우, 시장 규모는 1조 4238 억원이며, 건보 재정은 4,244 억원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그 돈으로 치료하겠다는 질병이 요통, 소화불량, 비염, 월경통, 갱년기 장애, 우울증, 불면증 등이다.
이미 수많은 약물로 이 같은 질환을 치료하거나 증상을 완화하고 있는데, 굳이 이런 질환의 치료에 건보재정 4,244 억원을 더 투입해야 할까? 과연 첩약이 효능은 있기는 하고, 안전하기는 할까?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경질환에 대한 보험 급여를 줄이고, 중증 질환에 대한 급여를 더 늘려야 할 때이다.
한의원 진찰료를 왜 의원 진료료의 3 배 가까이 올려주고, 첩약 급여, 한의 물리치료, 자동차 보험 적용 등을 해 주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거와 달리, 국민들이 한의원을 더 이상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의업계의 위축되고 고사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국가가 면허를 발급해 주었고, 의료법으로 보호해 주고, 국민건강보험 요양기관으로 지정해 주었지만, 활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요가 없으면 자연 소멸되는 것이 정직한 것이다. 한의학이 우수하다면 국가가 애써 살려주려고 할 이유도 없다. 한의학의 성장이 국가 경쟁력에 딱히 도움이 될 것으로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한의계를 계속 심폐소생술로 숨을 붙여 놓으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납득이 안되니 정치적 거래로 의심받는 거다.
4. 효율적 재정 운영
70조를 주무르는 건보공단의 방만한 운영도 문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중국인 2조4641억원을 포함해 외국에게 지급한 재정 규모가 3조440억원이다.
지금 코로나-19 치료비의 80% 는 건보 재정에서 나간다. 알다시피 국내 확진자는 물론, 외국인도 모두 무료로 치료해 준다. 그 비용은 건보 재정에서 나간다.
이런 식의 생색내기에 건보 재정이 줄줄 샌다.
왜곡되고, 부당한 건강보험제도는 개혁 없이는 바뀌지 않는다. 이미 누더기 상태이다.
건보재정 지출 규모는 10년에 비해 거의 두배가 늘었다. 이렇게 늘어나는 재정규모를 국민이 감당하기는 어렵다.
재정 지출 규모가 는다는 건, 의료 소비가 는다는 것인데, 재정 증가를 억제하려면 소비를 줄여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부도 국민을 향해 '의료 소비를 줄이라'고 말한 바 없다. 그럴 배짱이 없는 거다.
오히려 보장성을 강화해 주겠다며 문 케어 따위를 들고 나왔다. 그 재원은? 도대체 누가 부담하란 말인가.
효율적 재정 운영에 대한 연구나 방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연구를 하기는 하는 걸까?
국민들에게 소비를 줄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는 정부 당국자와 보험자는 의료 공급자의 목을 졸라 소비를 줄이는 편리하고 게으른 방법을 지난 수십년동안 써 왔다. 비겁한 짓이다.
의사들이 건보 재정을 걱정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재정 상태가 나빠지면, 의료계를 마른 수건 짜듯 짜내고, 의사 목을 더 조르기 때문이다.
이젠 고만 해라.
2020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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