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신으로 간주하지 말라
의사의 의료 행위 바탕에서는 '선의(善意)'가 깔려 있다.
그 '선한 의도'를 빼고 보면, 의사의 행위는 도살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도살자처럼 칼과 가위로 무장한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건, 오로지 그 '선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신(God)이 아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의사도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당신처럼 실수투성인 인간일 뿐이다.
대한민국 재판부는 그 선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과오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처벌을 명령한다.
형벌은 국가가 국민에게 내리는 징벌이다.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피해자를 대신해 국가가 복수하는 걸까?
근대 형법 사상의 기초를 마련한 이태리 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는 그의 저서 "범죄와 형벌"에서 형벌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형벌의 목적은 오직 범죄자가 시민들에게 새로운 해악을 입힐 가능성을 방지하고, 타인들이 유사한 행위를 할 가능성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을 형벌 이론의 '예방형론' 혹은 상대적 형벌론이라고 한다. 그 대척점에 있는 이론이 "응보형론" 혹은 절대적 형벌론이다. 이는, 형벌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응보에 있다는 주장으로, 칸트가 주장한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항상 주체로 취급되어야 하며, 객체로 다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형벌에 대한 예방적 고려를 반대했다.
의료행위에 대한 형벌은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지는가?
동일 범죄(?)의 예방? 아니면, 피해자에 대한 응보형적 처벌?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들에게 아무리 형벌을 가해도, 그것이 의료 사고를 예방하거나 의료 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은 적다. 왜냐면 대부분의 의료 사고는 불가항력적으로 예기치 못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의 명백한 실수로 발생하기도 한다.
의사의 명백한 실수를 Medical malpractice 라고 한다. 이의 법률적 해석은 '낮은 수준의 미숙한 처치 혹은 게으르고 태만한 처치로 환자에게 상해를 가하는 것(bad, unskilled, or negligent treatment that injures the patient)' 을 의미한다.
Mal- 은 나쁘다는 의미의 라틴어 malus 에서 유래한 것이며, 의학적으로는 질병을 의미하기도 한다. Practice 는 수행, 실행한다는 의미이며, 연습, 훈련의 의미도 있다.
이 때문에, malpractice 는 '제대로 교육 (훈련)받지 못해 생기는 의료 사고'를 의미하기도 한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거나 안일한 태도로 환자에게 상해를 가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면허를 박탈하고, 처벌하여 교도소에 처 넣어야 할까?
그렇게 해서 체사레 베카리아의 형벌의 목적대로, 의사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까?
아니면 칸트의 주장대로 응보적 형벌의 댓가를 치루도록 하여야 할까?
사실, 의료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그 행위를 하는 의사이다. 그러나 의료사고는 필연적 혹은 필수불가결하게 늘 발생한다.
2008년 8월 미국 외과 연보(Annals of Surgery in August of 2008)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시행되는 외과 수술 후 수술 기구나 스폰지 등을 남겨두고 나오는 경우가 12.5%에 달한다고 한다.
즉, 수술 환자의 10명 중 1명 이상에서 수술 후 뱃속에 가위나 솜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2012년 존슨홉킨스 대학 자료에 의하면 미국 외과의사들은 수술 후 환자의 몸 안에 스폰지나 수건 등 이물질을 넣고 나오는 경우가 매주 39회 발생하며, 심지어 잘못된 수술을 하는 경우가 20회, 반대쪽 부위를 수술하는 경우가 20회라는 것이다.
그 결과 이 같이 발생해서는 안되는 사고가 1990년에서 2010년 사이 무려 8만 건이 발생했으며, 2004년에서 2010년 사이 이 같은 사고를 경험한 환자의 6.6% 가 사망했고, 전체 건수의 1/3 은 영구적 장애를, 2/3 는 일시적 장애를 겪었다.
미국에서 이 같은 사고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No Sponge Left Behind"는 미국 병원에서 일종의 슬로건이다.
수술 후 스폰지나 이물을 넣고 나오거나, 다른 부위 수술을 하거나, 잘못된 수술을 하는 건 전형적인 'malpractice'이다.
만일 malpractice를 한 모든 의사를 형벌로 다스리면 매주 80명 가까운 미국의 외과 의사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교도소로 가야 한다.
20년간 8만명의 미국 외과 의사를 처벌했다면 미국 외과 의사의 씨가 말랐어야 하지만, 미국 외과계는 여전히 건재하다.
왜 미국 사법부는 malpractice 외과의사를 처벌함으로써 미국 의료계에 경종을 울리거나, 응보형적 처벌을 하지 않을까?
미국의 의료 사고 실태는 이뿐이 아니다.
뉴잉글랜드 저널 (NEJM) 등에 따르면, 미국 입원 환자의 2.9% to 3.7%에서 의료 사고가 발생하며, 의료 사고 사망자 수는 해마다 최소 4만4천명, 최대 9만8천명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며, 미국내 병원에서 병원 감염으로 해마다 7만5천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의료 사고는 미국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2017년 영국에서는 5세 여아가 천식 발작으로 가정의(Family Doctor)에게 진료 예약을 했는데, 예약 시간에 4 분 늦었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해 귀가 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해당 영국인 여성 의사에게 가해진 처벌은 6개월 정직이었으며, 정직 기간 중 온전히 급여를 받았고, 이후 이 기록은 5년 후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으며, 정직 이후 다른 의료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영국의 일반의(GP)를 관리하는 기구인 GMC 는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하고, "심각한 과실(nor so seirous)"이 아니라며, 해당 의사의 면허를 정지하거나 퇴출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물론 영국은 '천식 왕국'이란 점이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국의 천식 환자는 540만명에 이르며, 이중 110만명이 소아 환자로 소아 11명 중 1 명, 성인 12 명 1 명이 천식 환자이다. 영국은 천식 치료에 해마다 1조 5천억원 이상 사용하고 있지만, 매 10초마다 누군가 천식발작을 하며, 매일 270 명 이상이 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하루에 4 명 이상이 천식으로 사망해, 2014년 1,212 명, 2015년은 21%나 증가한 1,468 명이 사망했다.
우리나라처럼 천식 발작을 할 때마다 응급실을 찾는다면, 영국 병원 응급실은 천식 환자로 포화 상태에 이를 수 있어, 영국 천식 환자의 85%는 가정의인 일반의(GP)에게 치료를 받는데, 만일 천식 환자가 사망할 때마다 의사를 처벌하면, 영국의 가정의 역시 씨가 마를 것이다.
이 사례는 NHS (즉, 무상의료) 를 시행하는 영국의 의료 사고 한 예이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는 많다.
NHS를 시행하는 국가에서 가정의 혹은 주치의는 일종의 게이트 키퍼(Gate keeper) 역할을 하게 되며, 전문의나 병원으로 연결하는 통로의 수문장 역할을 한다.
즉, 주치의의 판단에 따라 환자는 전문의에게 안내되어진다는 것이다.
NHS 는 무상의료를 실현하는 것이므로, 환자의 별도 본인부담이 없어, 환자들은 모두 더 나은 진료를 요구할 것 같지만, 그 판단은 오롯이 주치의에게 맡겨진다.
만일 주치의가 검사를 제한하거나 전문의 진료를 제한하지 않고 모두 전문의나 종합병원으로 환자를 토스하면, 의료비 지출은 커지게 된다.
의료비를 부담해야 하는 국가는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물론 대놓고 치료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 기다리게 할 뿐이다.
우리나라 좌파 시민단체들은 주치의 제도 도입을 주장한다.
만일 한국의 일반의인 주치의가 '굳이 전문의 진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나, '굳이 그런 검사는 불필요하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나라 환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얼마 전 그런 식의 말을 했다가 몇몇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환자의 칼에 맞아 사망했다.
물론 그 가해자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아 (혹은 그렇게 추정되어) 이런 경우는 매우 극단적 상황이라고 하자.
그러나 아마, 대부분은 "그러다가 병이 악화되면 당신이 책임질거야?"라며 화를 낼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나 캐나다 의사들은 전문의에게 토스하지 않아 병이 악화될 때 책임질까?
법정 구속되고, 형사처벌 받을까?
아니다. 사안에 따라 아예 면책받고 없었던 일이 되거나, 명백한 Medical malpractice 라고 판정되면 재교육을 받는 것으로 그친다.
영국 천식 소아 역시 내일 다시 오라고 돌려보내졌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 의사가 진 책임은 6개월 정직이었을 뿐이다.
이런 일로 의사를 형사 처벌하는 건, 적어도 이들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의사는 어디까지 환자를 책임져야 할까?
환자나 보호자는 어디까지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참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계약법이 지독하게(?) 발달한 미국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내지 못한다.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환자 혹은 보호자와 의사 사이의 분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개입하여 의사에게 형벌적 징벌을 가하는 건 다른 얘기이다.
왜냐면 그건 의사의 행위를 선의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며, 의사를 인간이 아닌 무오류의 신으로 보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의사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기소한 체 유죄판결을 받지 못한 검사나, 항소심에서 뒤집어지는 판결을 내린 법관에게도 죄를 묻고 같은 형벌을 내릴 수 있다면, 신이 아닌 의사도 주어진 형벌을 겸허히 받겠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의사를 범죄자로 간주하지 말라.
2020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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