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의 변이 혹은 세대교체
신문이라고 불리려면, 다음 몇 가지의 특성이 있어야 한다. 즉, 대중성, 연속성, 주기성, 사실성이다. 다시 말해 신문으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대중이 볼 수 있어야 하며, 주기적으로 연속되어 발행되어야 하며,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신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1609년 독일에서 발행된 "Relation aller Fürnemmen und gedenckwürdigen Historien (Relation of all principles and memorable histories)"이다. 이 신문은 요한 카글로스에 의해 매주 발행되었다.
이후 독일에서 연달아 몇 개의 신문이 더 발행된 후 1618년 네델란드에서도 신문이 만들어졌고, 그 후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도 신문이 발행되었다.
영어로 된 최초의 신문은 Oxford Gazette이었으며, 1665년 런던에서 발행되었으며, 이후 London Gazette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도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신문은 1704년 The Boston News Letter 이다. 이 신문은 폐간되었지만, 1756년 발행을 시작한 The New Hampshire Gazette은 여전히 발행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1752년 Halifax Gazette이 최초의 신문이며, Quebec Chronicle-Telegraph(1764년)는 여전히 발행되고 있는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 최초의 신문은 1780년 영국 식민지 당시의 인도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이었고, 1845년 홍콩에서도 영자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신문은 상해에서 발행된 North China Herald (North China Daily News)이며, 역시 영자 신문이었다. (1850년)
최초의 중국어 신문은 홍콩에서 발행된 Chinese serial(1853년)이며, 일본 최초의 신문은 나가사키에서 1861년부터 발행되었으며 역시 영자 신문이었고, 일본어 신문은 그 다음 해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조선신보인데, 1881년부터 부산에서 발행되었고, 일본어로 발행되었다. 이후 1883년 한성순보가 발행되었는데, 한문을 사용했다.
이렇게 볼 때, 신문의 역사는 대체로 4백년을 넘겼고,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130년 정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문은 소식을 전하는 본격적 매체의 시작이며, 이후 라디오, TV 뉴스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상업 라디오 방송은 1920 년대 이후에 시작되었고, TV 방송의 시작은 1930 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뉴스를 전하는 주요 매체로 신문은 거의 3, 400백년, 라디오와 TV는 대략 100년 안팎의 전성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불과 2, 30년 전만 해도 신문과 방송은 뉴스 전달자라는 최고의 권위를 가졌고, 대중들은 아나운서의 말과 활자화된 글자를 굳게 믿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학자 알빈 토플러는 1980년 발간한 제 3의 물결에서 장차 종이 매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종이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의 아성이 무너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 조짐은 이미 인터넷이 대중에 의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30 여년 시작되었지만, 본격화된 건 10년 남짓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가속화한 건 모바일 기기와 소셜 미디어이다.
대표적인 소셜 미디어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경우, 모바일 기기가 대중화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막강한 파급력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며, 역설적으로 모바일 기기 역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미디어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널리 보급되기 쉽지 않았을 수 있다.
이 둘의 시너지는 뉴스의 생산과 확산을 가속화했고, 심지어 정권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중동의 민주화와 혁명은 소셜 미디어에 의해 촉발되고 강화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 뉴스가 통제되는 아랍권에서 페이스북의 사용 비율은 유럽이나 북미에 비해 훨씬 높다.
즉, 어떤 이들에게 페이스 북과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는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대중 매체보다 뉴스를 접하는 더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다.
아랍인 뿐 아니라, 국내 뉴스 소비자들 역시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기성 매체에서 이탈되는 이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신문 구독율은 떨어지고, 뉴스 시청율도 떨어지는 반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접하거나 유투브 등 일인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이 분명한 터닝 포인트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건이 그 계기였다고 기록될지 모른다.
이 탄핵 사건은 일부 매체가 방아쇠를 당기고 나머지 매체들이 동조하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흔들 큰 사건은 많은 뉴스를 생산하게 되므로, 뉴스로 먹고 사는 신문이나 방송으로써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위적으로 매체들이 대목을 만든 이 사건이 기성 매체의 목을 스스로 조르게 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낡고 오래된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등장하게 된다. 늘 역사는 그랬다.
물론 새로운 매체의 등장을 환호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것은 늘 불안정하며,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투브와 같은 일인 매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 역시 수 많은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물론 가장 큰 위험 요소는 검증되지 않은 체 정보가 쉽게 생산되는 것에 비해, 그 전파 속도는 매우 빠르며,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생산되는 정보를 통제하거나 책임을 묻기도 쉽지 않다.
한 마디로 누구나 괴물을 만들수 있으며, 그 괴물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신 매체로 만들어지는 정보의 통제는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다. 신뢰할 수 없고 검증되지 않는 정보가 확산될 경우, 정보 소비자들은 이에 쉽게 등돌릴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들 새로운 매체가 쉽게 또 빠르게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
이 가장 큰 이유는 정보 소비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이 접하는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대중의 세뇌는 더욱 용이해질 것이고, 결국 누군가는 이를 이용하려고 들 것이다. 이미 매체를 이용한 대중의 세뇌는 수 없이 이루어져왔다.
따라서 비특정 무작위 정보를 분별하는 능력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교육은 어릴때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교육을 성공적으로 받은 이들은 위험에서 좀 더 멀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늘 위험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거짓 정보는 인류가 시작될때부터 피부에 붙어 있는 세균총(bacterial flora)처럼 필수불가결하게 달라 붙어 있었으며, 때로는 면역력을 키워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2017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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