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믿을만 한가?





만일 학교를 마치고 사회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세상은 아직 믿을만 하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굉장히 운이 좋은 삶을 살고 있거나 혹은, 멍청한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이건, 아니면 사회주의 사회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21세기 현대의 사회 구조로는 '믿을만한 삶'을 살기가 사실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가족뿐이며, 때론 그 안에서도 배신과 음모가 판을 친다.

의사나 변호사, 금융 자문가를 믿는 건, 그들이 전문가라 믿을 만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별 대안이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전문직종 중에, 전문가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손을 들어 "윤리 선언"과 같은 선언을 하는 직종은 의사나 간호사 정도이다. 대통령도 취임 시 선언을 하지만, 그건 국가에 대한 충성과 대통령 직에 대한 의무 선언이지, 윤리 정신을 선언하지는 않는다.

변호사나 세무사, 부동산 중개사가 그 직의 수행 전에 의무적으로 윤리 선언을 한다는 이야기는 불행히 듣지 못했다.

그러나 윤리가 필요한 건 의사나 간호사 뿐이 아니다.

윤리적이어야 하는 건, 변호사나 금융전문가 뿐 아니라 미용사나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사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는 미장원이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매만지는 그들이 그들의 양심을 걸고 최선을 다한다고 믿을 수 있나?
(얼마 전 면도기를 두번 사용하면 벌금 50만원을 부과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주방에서 조리하는 요리사가 양심껏 청결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내게 집을 보여주는 부동산 중개사가 가장 튼튼하고 적절한 가격의 주택을 보여 주고 있다고 믿을 수 있나?

그걸 확신하는가?

또, 내게 금융 상품을 추천하는 은행원이나 보험/금융 상담사가 가장 안전하고, 수익율이 높은 상품을 권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혹시 그들은 안전성이나 수익율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미는 상품 혹은 자신이 받을 수수료가 가장 높은 상품을 권하는 건 아닌가?

금융상품을 파는 은행원이나 금융 상담사들은 자문을 할 뿐,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니 그들에게 윤리를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의사도, 수술에 대한 설명을 하고, 환자에게 수술 결정을 하도록 하며, 구매한 투자 상품의 자금 운용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 운용사에서 한다. 나는 투자금을 낼 뿐,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언제 주식을 사고 파는지, 얼마나 자주 회전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안다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수술 결정은 환자가 하지만, 수술은 의사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술을 잘못 할 때만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다.

노후 자금을 몽땅 잃은 노인이 자살하는 일은, 수술 잘못으로 사망하는 경우 만큼이 빈번하다. 설령 자살하지 않더라도, 재산을 잃은 투자자는 수술을 잘못 받은 환자 만큼이나 오랫동안 고통스런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하며 처음부터 거액의 수임료를 요구하는 건, 사실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교사는 어떨까?

우리는 그 교사가 아이들을 얼마나 잘 가르칠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반사회적인 불온한 생각을 심어주거나 왜곡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나?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는 것은 어리석으며 불손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윤리 선언"이라도 하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는, 비행기를 조정하는 비행사나, 지하철이나 버스를 모는 이들이, 아니 내 옆에 차를 몰고 가는 운전사가 뱃속이 좋지 않아 빨리 화장실에 가려고 서두는 것이 아닌지, 술을 마셨거나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몽롱한 체로 운전하는 것이 아닌지, 부부싸움 끝에 나와 화가 가시지 않아 난폭하게 운전하는 것은 아닌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을 믿고 옆에서 운전하며 갈 수 있을까?

해마다 수 백명이 죽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믿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있는데도?

인생이 복불복일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이렇듯, 불확실과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받아들여야 할 엄연한 진리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돌아가는 건, 이 불신을 상쇄하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들이 있고, 사실 그래도 세상은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장치 중 하나는 바로, '법'이다.

의료법, 변호사법, 식품위생법과 민법, 형법 등으로 우리들 사이에 '그러지 말라'고 약속을 정하고 그걸 어길 경우, 처벌하고 보상하도록 규율을 정해 두고, 이를 시행하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막 가는' 행동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법이란, 믿을 수 없는 세상이 그나마 돌아가게 하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것이다.

따라서, 이 약속을 깨면 법으로 처벌해야 한다.
즉, 처벌받아 인신이 구속되고 재산상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세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행하는 '믿을 수 없는 행동' 모두를 법으로 규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장치 만으로는 믿을 수 없는 세상을 믿어가며 살 수 있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남들처럼 그냥 다소 멍청하게 살던지, 아니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주의깊게 살아야 한다.

이미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방어 운전이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다.

방어 운전만 필요한 게 아니라, 방어 인생을 살아야 하며, 그걸 잘 하려면, 육감을 길러야 한다.

육감, 즉 6th sense는 부지불식 간에 내가 나 스스로에게 알람을 울리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설마?'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설마, 저 사람이 나한테..."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의 지력이나 판단력이 아닌 육감이 이미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에게 피하라고 사인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육감을 기르거나, 육감이 뛰어난 사람 곁에 있는 편이 좋다.

네비게이터의 여성은 프로그램된 사실을 알려줄 뿐이지만, 마누라 말은 그래서 믿으라는 것이다. 보통 남자보다 여성이 육감이 뛰어나고, 여성보다는 마누라들이 육감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정확하게는 남자들의 육감이 여성에 비해 떨어진다고 보긴 어렵지만, 다만, 남자들은 자기 확신이 강해서 육감보다는 오감, 오감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더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또 남자들의 문제는 육감이 보내는 사인보다는 '의리', '허세', '체면'을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통계학적으로, 미혼남이나 독신남의 수명이 짧은 이유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보다 마누라의 육감이 뛰어난 건, 보통 부인들의 경우 가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더 크고 가족 보호 본능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 보호 본능이 뚜렷하다보니, 육감이 발동하면, 의리나 허세, 체면 따윈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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