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 신앙심을 부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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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신앙심을 부여할 수 있는가?
1. 인간의 새로운 도구, 인공지능
원래 인간은 연약한 동물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세상을 지배하며 호랑이 사냥을 하고, 독수리보다 더 높이 날고, 돌고래보다 더 깊이 잠수하며, 치타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건, 인류 만이 가진 지능과 도구 때문이었다.
새로운 도구는 늘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생애에 개인용 컴퓨터라는 새로운 도구의 도래를 목도한 바 있으며, 그것이 이룬 업적과 파장 또한 체험한 바 있다.
개인용 컴퓨터는 인류에게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영향을 주었으며, 그것은 모바일 기기로 여전히 진화 중이다. 분명한 사실은 현존 인류의 상당 수는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에서 벗어나 하루도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다.
인공 지능도 인류가 오래 전부터 상상해왔던 것 즉, 또 다른 새로운 도구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공 지능은 개발되어 왔고, 시험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의 지능을 흉내낼 뿐 인간의 그것을 뛰어 넘지는 못했는데, 이번 알파고의 실험은 인류 중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이를 이겨냄으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물론 사람보다 바둑을 더 잘 두는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꿀리는 없다.
그러나 바둑은 단지, 주어진 여러 조건 속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을 테스트 하기 위한 실험 방법일 뿐이다.
바꾸어 말해, 이번 실험을 통해 어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인공 지능은 인간보다 우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우기 그같은 결정에 필요한 경험, 정보, 판단 능력이 불과 수 개월 만의 인공 지능 학습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 더욱 놀랍다.
이세돌 9단과의 2 국 후반에 많은 이들은 알파고가 우상변 끝내기에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정적 실수를 하고 있다는 본 건, 바둑 판의 형세와 이제까지의 경험과 직관에 따른 “사람의 판단”이었으며, 그 판단이 틀렸다는 건, 인간의 경험과 직관에 따른 믿음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믿음이 깨어진 것이다.
2. 신앙과 같은 믿음
종종 우리는 우리 부모로부터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어렸을 때, 그래서 상황 판단이 어려운 나이일 때는 거부감없이 그 지시를 따르지만, 사춘기에 이르고 생각이 자라기 시작하면 부모의 지시가 바보같다며 거부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같은 지시는 나에게 불리하며 손해를 입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대개 청소년기의 부모와의 갈등은 이런 식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충분한 설명이 없는 일방적 지시와 그 지시가 어리석다고 반발하는 머리가 큰 자식과의 갈등.
그러나 부모의 지시가 옳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두 가지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이 불리하지 않게 판단을 해 줄 것이라는 믿음과 둘째, 그 자식보다 부모에게 더 많은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를 믿는다면 자신의 <판단>을 접고 부모를 따르는 편이 좋다. 그 판단이란 자신이 배우고 겪고 경험한 것이므로, 판단을 내렸다는 것은 그것을 믿는 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깨고 부모의 지시를 따르기란 사실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신앙과 같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이란 믿음의 한 종류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다는 건, 자신이 보고, 만지고, 경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신앙을 종교적 믿음이라고 한다.
종교를 이야기할 때, 인간과 절대자의 관계를 개미와 인간에 비유해 말하곤 한다.
바닥을 기는 개미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만일 알파고가 30 수, 50 수를 미리 내다보고 있다면, 사람은 알파고의 생각(그 수)을 읽을 수 있을까?
3. 인공지능을 확신할 수 있을까? 신앙처럼?
다시 어제의 바둑 현장 (2국)으로 돌아가 보자.
해설자와 관전자들은 하나 같이 ‘분명히 알파고가 실수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세돌이 알파고의 실수를 유도했다.’고 까지 말했다. 그러나 집 수를 세워보면 늘 집 수가 모자랐다. 매번 이세돌이 우세한 것 같아 보였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인간의 판단은 틀렸고 알파고가 옳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바둑에 있어서 만큼은, 알파고의 착수는 늘 최선이라고 믿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인공지능 개발은 여전히 실험단계이고 매우 제한적이다.
이를 실제 활용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고 보다 많은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래서 결국 실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그 때의 인공지능의 판단이 인류의 판단에 반한다면 누구의 판단을 따라야 할까?
인공지능의 판단을 신앙과 같은 믿음으로 믿고 따라야 할까?
아니면 부모에게 그러듯 반발해야 할까?
사실 자신의 판단과 반하여 다른 이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그의 지시를 확신한다기 보다는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부모를 존중하기에 따를 뿐,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점, 즉 부모가 나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나보다 경험이 많기 때문에 옳은 판단을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믿음은 있어야 한다.
아니면 그 판단이 지금은 나를 위태롭게 하지만, 길게 볼 때 부모의 판단이 맞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인류는 언젠가 인공지능이 인류에서 훨씬 우월한,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을 내릴 때, 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그 결정을 따를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당장은 위태로워도 장기적으로는 유리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이어질 때 알파고의 바둑에 패닉을 갖는 건 당연한 것이다.
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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