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제인가 예방제인가?
못에 찔리거나 베여서 병원에 가면 항생제와 함께 파상풍 주사를 맞는 경우가 많다.
파상풍은 지금은 매우 드문 감염병이지만, 걸리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파상풍균은 혐기성 세균으로 산소가 있는 환경에서는 생존하지 못하나 흙이나 낡은 가옥, 농기구 등에 포자의 형태로 발견된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출생 시와 소아에 파상풍 예방 백신을 맞는다. 보통 파상풍과 디프테리아, 백일해 백신(DTaP)과 함께 접종하며, 생후 2, 4, 6개월에 각 1회 기본 접종 후 생후 18개월, 5세, 12세 경에 추가 접종을 시행한다.
이렇게 맞는 파상풍 예방 주사는 몸이 스스로 파상풍에 대한 항체를 만들도록 하기 위한 예방접종이다. 이를 능동 면역 (active immunization)이라고 한다. B형 간염 예방 접종과 같다. B형 간염의 경우 세 차례 접종할 경우 대부분 항체를 스스로 만든다.
능동적 백신은 약독화시킨, 즉 균의 독성을 약화한 세균으로 만들기도 하고, 아예 아무런 균 없이 항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백신을 쓰기도 한다.
파상풍 예방 접종을 했다면, 다쳤을 때 파상풍 주사를 맞을 필요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면, 파상풍 백신(Td)은 항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예방 접종 후 대략 10년이 지나면 항체 생산 능력이 떨어지거나 없게 된다. 그러므로 12세를 끝으로 20대 이후에 더 파상풍 예방접종을 하지 않는 한 성인은 파상풍 주사를 맞을 필요가 있다.
상처가 나서 병원에 갔을 때 맞는 파상풍 주사(TIG)는 항체를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능동 백신이 아니다. 파상풍균을 무력화시키는 항체를 맞는 것이다. 이 항체를 파상풍 면역글로불린(Tetanus Immunoglobulin)이라고 하며, 이렇게 면역력을 획득하는 것을 수동 면역(Passive immunization)이라고 한다.
왜냐면, 파상풍 능동 백신(Td)을 맞아 스스로 항체를 형성할 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만일 균에 감염되었다면 늦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체를 가진 다른 사람의 피에서 추출한 항체를 모아 이걸 맞는 것이다.
간혹, 파상풍 주사(TIG)를 놓을 때, 자신은 전에 다쳐서 이미 파상풍 주사를 맞은 적이 있다고 거부하는 환자도 있다.
그러나, 파상풍 항체 주사(TIG) 효과는 길어야 3개월이면 사라진다. B형 백신의 경우, 일단 항체가 생기면 평생 예방접종이 필요 없는 것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파상풍의 경우 3개월 안에 주사를 맞은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맞아야 한다.
이번에 논란이 된 탄저균의 경우, 스스로 항체를 만들도록 하는 능동 면역을 유도하는 예방 백신도 있지만, 탄저균 감염의 가능성이 있을 때 예방 혹은 치료하기 위한 항체도 있다.
청와대에서 탄저균 백신을 수입한 Emergent Biosolutions 사는 능동 면역을 위한 예방 백신 BioThrax 와 수동 면역을 위한 백신 Raxibacumab와 Anthrasil을 모두 생산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경우, 파병 미군에게는 BioThrax 를 투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략 20만 명 이상 접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ioThrax 는 최소 4회 이상 접종해야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보통 18개월에 걸쳐 5회 접종하며, 이후 해마다 맞도록 하고 있다.
Raxibacumab 은 단일 클론항체(monoclonal antibody) 이며, Anthrasil 은 인 면역글로불린(human immunoglobulin) 이다. 즉, Anthrasil 은 탄저균에 감염되었거나 예방접종 후 항체가 생산된 제공자의 피에서 추출한 항체이다. 그러나 탄저균 감염자는 그리 많지 않고, 탄저병 예방 접종자 수도 많지 않으므로 이를 통해 많은 양의 항체를 생산할 수 없다. 그래서 유전자 재조립 방식으로 단일 클론항체 Raxibacumab 을 만든다.
탄저균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큰 경우 Raxibacumab 을 투여하면, 탄저균의 증식을 억제하여 발병을 막을 수도 있으며, 이미 감염되었을 때 치료제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시프로플록사신이나 독시사이클린과 같은 항생제를 병용할 경우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능동 면역을 위한 BioThrax 의 접종 비용은 1천 불 이상으로 비싸다. 청와대를 통해 알려진 500 명분 탄저균 예방제의 가격은 3천만 원으로 dose (1회 주사제) 당 6만 가량에 불과하므로 BioThrax 를 구매한 것이 아니라, Raxibacumab를 사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일각에서 주장하듯, 탄저균 예방 백신을 이미 맞았다는 건 틀린 주장으로 봐야 한다. Raxibacumab 은 탄저균에 감염되었거나 노출되었을 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맞았느냐 아니냐, 수입한 것이 예방 백신이냐, 치료제냐 하는 건 의미 없는 논란이다.
게다가 2015년 오산 기지 탄저균 반입 논란으로 이걸 이제 와서 수입한다는 주장도 납득이 어렵다.
오산기지 탄저균 논란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이 크다.
미군은 탄저균 대응 훈련을 위해 국내외 각 기지에 사멸화된 균을 우편으로 보내고, 이에 대응하는 훈련을 해왔다. 2000년 초에 미 의회와 언론사, 백악관 등에 탄저균을 봉투에 넣은 체 우편으로 보내 희생자가 발생하는 테러가 수차례 반복된 바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테러가 국제테러집단에 의한 것이라는 건 밝혀지지 않았으나 탄저균은 북한 등 여러 나라에 종균이 있으므로 언제든지 테러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FBI는 8년간의 수사 끝에 유전자 조사를 통해 미 육군 소속 생물학자가 범인이라고 주목했으나, 정작 그 혐의자는 자살한 후였다)
아무튼 50군데가 넘는 발송지 중 한 기지에서 사멸된 것으로 생각한 균이 배양되는 것을 발견하였고, 국방부는 부랴부랴 발송된 소포를 개봉하지 말고 폐기하라는 지시를 각 기지에 내렸다.
주한미군 즉 오산기지에도 같은 소포가 배달되었고, 개봉되지 않은 체 폐기되었다. 동시에 소포가 거쳐온 경로를 모두 조사했으나 균은 발견된 바 없다. 따라서, 오산기지에 살아있는 탄저균이 배달된 것인지 사멸화된 탄저균이 배달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를 두고, 오산 기지에서 탄저균 실험을 한다거나, 균을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억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탄저균 스캔들의 핵심은 정부의 이중적 태도이다.
북한의 안보 위협은 현실이며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와대가 탄저균 백신을 수입했다는 건 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눈앞의 위기를 국민에게 공개해야 한다.
만일 위기가 없다면 'VIP와 청와대 직원'을 위한 백신을 수입할 이유가 없다. 설령 당장의 위기가 없더라도 북한이 수 천 톤의 생물학적 무기를 만들어 둔 이상 최소 국군을 위한 예방 백신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게 상식 아닌가.
현재 미국은 천 만 명에게 투여할 수 있는 양(6천만 dose)의 BioThrax을 가지고 있다.
2017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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