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트럼프
지난 11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볼튼 보좌관이 리비아 모델을 언급한 건 굉장히 큰 실수였으며, 카다피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해보라'며, '리비아식 비핵화를 고집해 북핵 비핵화에 차질을 빚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방식(new method)'의 사용을 주장했는데, 미국의 전문가들은 이 새로운 방식이 '단계적 비핵화'가 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단계적 비핵화는 이제까지 북한이 고수해온 비핵화 방법이며, '살라미 전술'로 알려진 것이다.
즉, 영변 핵 시설 폐기 후 보상, 또 다른 시설 폐기 후 보상 하는 식으로 단계적 비핵화를 하는 것이다.
살라미 전술은 언급했듯이 1차 북핵 위기 후 북한이 줄곧 사용해왔던 것이다.
그럼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일까?
그는 전임인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를 비난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 역시 집권 3년이 되도록 김정은과 수 차례 만났을 뿐, 이렇다할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도대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비핵화에 갖는 전략은 뭘까?
1. 리비아식 비핵화
우리는 먼저 트럼프 대통령이 실수라고 한, 리비아식 비핵화에 대해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리비아가 핵 무기 개발 도중 핵을 포기한 건, 그때까지 '여러 상황' 이 있었고, 그 상황에 몰린 끝에 카다피 스스로 핵 폐기를 결심하며 시작되었다.
그 상황이란, 1) 미국의 제재 2)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및 후세인 검거 그리고 3) 미국의 공습이다.
미국은 2004년 제재를 풀기 전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리비아를 경제 제재했다. 뿐만 아니라, 미해군 전단을 지중해로 보내 해상 봉쇄를 했고, 1986년에는 유럽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30여대의 전투기를 보내 공중 급유를 거듭하며 무려 1만 킬로미터를 날아가 리비아를 폭격하게 했다. 이 사건으로 카다피 궁이 박살 났으며, 그의 딸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3년 6월에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을 체포했다. 카다피는 이라크 침공 직후 영국에 비핵화 의지를 타진했고, 후세인이 체포된 직후 비핵화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미국은 약 2년에 걸쳐 리비아에 있는 모든 핵무기, 개발 장비, 설계도 등 문서를 고스란히 미국으로 실어 날랐다.
폐기 완료 후에도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완전히 풀고 리비아에 미국대사관을 설치하기까지 또 1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리비아식 비핵화는 흔히, 선 비핵화, 후 제재해제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리비아식 비핵화를 언급한 건 큰 실수'라고 한 건, 북한을 선 비핵화, 후 제재해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리비아와 북한은 여건이 다르다는 의미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면, 종전 이후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거나 공습한 바 없고, 최근에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를 처형해 겁을 주는 일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즉, 리비아식 비핵화는 그 경과나 상황이 어쨌든, 절대 권력자가 스스로 비핵화를 결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김정은은 겉으로는 비핵화를 말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리비아식 비핵화를 북한에 적용하는 건 현재로는 불가능하며 이런 policy 를 세우고 비핵화를 추진하는 건, 사실 '바보 같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그렇다면, 김정은은 비핵화 의지가 확실히 있을까?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이 정권에 속한 사람들 뿐일 것이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2018년 3월 북한에 가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 온 후,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김정은은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고,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 같은 주장은 과거도 있었다.
2005년 DJ 정부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동영이 북한에서 김정일을 만날 당시, 김정일은 '북한은 핵무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며,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며 따라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전했다.
김정일은 2009년 원자바오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도 같은 얘기를 했다.
김정은도 하노이에서 로이터 통신 기자의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는 직설적인 질문에, “그럴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즉, 북한의 체제가 보장된다면 다시말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비핵화는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이라는 것이 북한의 '공식적' 입장인데, 사실은 북한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김정은은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보장 받고, 경제적 지원과 제재 해제를 위해 핵무기와 ICBM 을 만들고, 수없이 실험하고,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SLBM 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잠수함을 만들고 있을까?
김정은은 남한을 해방시키고, 한반도 공산화를 하겠다는 북한 정권의 목표를 버릴 수 있을까?
미국의 제재 해제와 경제 지원을 받아 북한을 산업화하고 시장 경제를 일으켜 부국으로 만들어 인민을 행복하게 살게 하겠다고 생각할까?
결코 아니라고 본다.
3. 북한의 노림수
그렇다면 김정은이 수시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고, 트럼프 대통령을 띄워주며 아양을 떠는 이유는 뭘까?
도대체 김정은의 전략을 뭘까?
김정은이 원하는 건 제재 해제이다.
이건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다. 통치 자금이 떨어져가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제재를 더 오래 받게되면 북한 주민들의 민심이 요동치고, 정권을 떠받들고 있는 세력의 결집력도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지난 하노이 협상에서 영변 핵 시설 폐기를 내놓고 제재 일부 해제를 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김정은의 입장은 곤란해진다.
또 다른 노림수는 평화 무드 조성과 함께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미국으로하려금 북한은 힘이 있지만,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즉, 핵의 폐기가 아니라 동결을 주장할 것이다.
4. 미국의 노림수
최근 존 볼튼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질과 이와 관련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국내외 북한 전문가와 여론을 불안하게 한다.
조선일보는, 북한은 핵보유를 위한 계산법을 가지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여러 여건을 고려해, 핵동결 수준에서 제재를 풀어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가는 길을 터 줄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사설을 썼다.
그러나 이런 일각의 우려는 기우에 그칠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미국은 '법치국가'이며, 트럼프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고, 미국 대통령은 미국 법을 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북 제재법 (2016년)은 미국 정부가 대북 제재를 해제할 수 있는 조건 10가지를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으며, 북한이 법이 정한 해제 조건을 충족했다는 것을 입증해 의회에 제출하지 못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제재를 해제할 수 없다.
이 조건 중에는 미국 위조지폐 발행 및 돈 세탁 중단, 유엔 안보리 결의안 준수, 납북, 불법 억류 외국인의 송환, 인도주의적 원조 배분의 입증, 정치범 수용소의 생활 개선 검증 등이 있으며, 이를 충족할 경우 미국 대통령은 1년 가량 제재를 일시 해제할 수 있다.
즉, 1년간 제재 유예를 받기 위해서라도 북한이 '까고 공개해야 하는'것이 너무 많다.
더구나 핵, 화학, 생물학 무기의 완전한 폐기와 정치범 수용소의 모든 정치범 석방과 대의 정치 체제 구축, 정치활동 검열 중단을 하지 않을 경우 완전한 제재 해제는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김정은 체제가 존속되는한 북한은 제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법이 이러니, 트럼프 대통령이나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김정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제재 해제 요건을 준수하라'는 것 밖에 없다.
만일 미국이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말려, 단계적 비핵화에 동의해 단계적으로 제재를 해제하거나 지원을 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법을 어긴 것이 되며 탄핵 사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럼 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발언과 제스처를 할까?
5. 외교적 vs 군사적
국가간 분쟁의 외교적 해결은 대화와 협상을 통하는 것이다.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군사적 노력을 쓰는 수 밖에 없다. 만일 그 분쟁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면 말이다.
93년 이래 미국은 북핵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미국 뿐 아니라 국제 사회는 6자 회담 등 수 차례 외교적 해결을 위해 만나고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 약속을 번번히 어겼고, 합의는 깨졌으며, 이렇게 시간을 끈 결과 이제는 미국 본토를 핵 공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북한은 절묘한 외교 수법으로 시간을 벌었고 미국과 국제 사회는 넋 놓고 쳐다만 봤다. 오바마는 이런 무대책을 '전략적 인내'라는 PC 용어로 포장했다.
그걸 가장 비난하던 인물이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런데 지금 시간을 끄는 건, 북한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다.
사실 2018년 말까지만 해도 당장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걸 트럼프 대통령의 블러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
1차 북핵 위기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중단한 이유나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력 동원을 중단한 이유 모두 지나치게 많을 인명 피해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중국은 북한과의 국경에 대규모 군사력을 배치하고 여차하면 한반도로 진격할 모습이었다.
지금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하는 이유는 단지 중국을 공정 무역국가로 바꾸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도 있다고 봐야 한다.
즉, 중국을 묶어두어야 북핵 해결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며 일본을 무장시키고, 일본 자위대의 행동 반경을 넓히려는 것도 유사시 일본의 지원을 받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차근차근 군사적 행동을 위한 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시간을 끄는 이유는 뭘까?
내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이미 미국 대선 레이스는 시작되었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건 재선에 성공하는 것이다.
볼튼은 더 시간을 버리며 북한에게 기회를 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재선이 더 중요하다. 재선에 성공 해야 비핵화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볼튼은 이런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재선까지는 무려 13 개월 가량이 남아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 속에는 그 13 개월 동안 북한이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 뿐일 것이다.
그러려면 김정은을 묶어 놓을 것이 필요하다.
즉, 협상을 재개하면서 시간을 끌고, 필요하면 칭찬하고, 과도한 애정을 표현하며 김정은이 엉뚱한 생각이나 도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이란 미끼도 던져야 한다.
새로운 방법이란,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이 말한 새로운 계산법을 의미할 것이다. 원하는 걸 줄 수 있다는데 북한이 이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은 아무리 핵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미국의 코털을 마구 건드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6. 결론
군사적 행동없이 북핵 비핵화는 불가능하다.
대화와 협상은 시간을 끄는 것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간계에 넘어갈 것이라고 보는 건 억측이다. 지금은 미우나 고우나 그를 믿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의심은 품어야 한다.
- 아마 그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불쌍한 노인네...
2019/09/22/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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