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에 33명이 서명한 이유











국내 천주교 처음 전래된 건 임진왜란 (1592~1598) 때이며, 일본군을 따라온 예수교 선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조선 시대 백성들에 천주교가 포교되기 시작한 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이승훈에 의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승훈은 그에게 세례를 받은 역관 김범우와 이벽,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 등 실학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며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1879년,이응찬, 서상륜 등이 만주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 개신교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미국 등의 해외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건 1890년대 부터이다.

한국 천주교나 기독교의 특징은 선교사가 들어와 포교 활동을 하기 전 중국에 나가 천주교나 기독교에 먼저 귀의하고 들어와 포교했다는 것인데, 이런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천주교 주교회의 자료에 의하면 1897년 천주교 신자는 32,217 명에 이르고 10년 뒤인 1907년 63,340 명으로 거의 두 배로 늘어난다.

반면, 1879년 도입된 기독교 신자의 경우 1897년 6,800 명에 불과했으나 10년 뒤인 1907년에는 72,968 명으로 오히려 천주교 신자 수를 넘어선다.

다시 12년 뒤인 1919년에는 천주교 신자는 88,553 명으로 2만명 가량 증가했을 뿐이나, 기독교 신자는 144,062 명으로 다시 두 배로 늘어났다. 20년 동안 약 21배의 증가 속도를 보인 것이다.

천주교는 서학(西學)으로 분류되었고, 뼈속까지 유교에 젖어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를 배척하는 천주교는 경원의 대상이었으며,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포교하거나 믿는 자들은 처형했다. 이 때 수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경주에 살던 최제우는 1860년 서학(천주교)와 대립하는 동학(東學)을 창시한다.

동학은 인내천 사상을 배경으로 인간의 주체성, 평등 사상, 인권주의를 설파하며 양반들의 지배 논리를 배척함으로써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사실 이 같은 사상은 당시 천주교의 주요 교리라고 할 수 있으며, 천주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봐야 한다.

조선 지배 계급은 이 같은 사상이 퍼지는 것을 경계하여 천도교 창시 3년 만에 혹세무민의 이유를 들어 최제우를 처형하고, 최시우가 그 뒤를 잇는다.

동학은 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편된다.

1919년 독립선언서 작성에는 이른바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을 했다.

이 선언문을 주도한 건 천도교였고, 이에 응한 건 개신교뿐이었다.

애초 천도교 대표 15인, 기독교 대표 15인이 서명키로 했으나 당시 기독교 교단의 양대 산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각각 8명의 대표를 내기로 해 한 명이 늘었고, 뒤늦게 불교도 2 명의 대표를 보내 33인이 되었다.

천주교가 참여하지 않은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나 그 이유가 명백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일제시대 천주교에서는 이상한 움직임이 있었다.

천주교가 전해지던 초창기, 조상 제사는 포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천주교와 기독교 교리에서 조상 제사는 우상 숭배에 해당하므로 조상 제사를 거부한 초기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1939년 교황청은 조상 제사를 허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교황청은 비슷한 시기에 신사참배도 허용했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앞세우며 조선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것이 바로 신사참배인데, 1935년 전후 신사참배를 강제화하였다.

천주교와 기독교 모두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거부하였으나, 이를 거부할 경우 탄압했다.

신사참배는 일본 천주교 내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1932년 일본 천주교단은 일본 정부에 신사참배가 종교 의식인지 국민 의례인지를 묻는 질의를 했다. 일본 정부는 국민 의례라고 답했다.

이 답변을 근거로 로마 교황청은 1936년 신사참배를 허용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교황청은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고 박해받는 교인들을 옹호하고 보호해야 하고, 이를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비난해야 하는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일본과 이태리는 우호적 관계에 있었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양국은 나치 독일과 함께 3국 동맹을 맺은 주축국이었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교황청이 신경쓸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 일본 천주교 교단이 신사참배에 대한 질의를 한 것도, 반도에서 조선 천주교인들이 이에 반대하지 못하게 할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한편,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강력히 거부하였다가 탄압이 심해지면서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고, 계속 희생이 이어지자 1938년 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총회에서 결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반대한 주기철, 최상림 목사 등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체 옥사했다.




2019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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