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의 교훈















세상의 이목이 모두 아프간에 쏠려있지만, 아프간의 현 상황은 미래에 대한 공포로 생긴 난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공포로 더 큰 난리가 난 나라가 있다.

바로 아이티이다.

아이티는 대통령 암살에 따른 정국 혼란에 이어 지난 14일 진도 7.2 의 강지진으로 1,200 명 이상이 사망한 가운데, 허리케인 그레이스가 아이티 섬을 강타하고 있다. 아이티는 허리케인이 지나는 길목에 있어, 자주 영향을 받는다. 2016년에는 5 등급 허리케인 메슈로 900 명 가까이 사망했다.

게다가 아이티 국민은 코로나 백신을 대부분 맞지 못한 상태이다. 상황이 이러니 아이티에 대한 구호의 손길도 예전 같지 않다.

예전이란 2010년 1월 아이티 대지진을 말한다.

당시 미국을 비롯해 수십 개 국가들이 의료진과 피해 복구를 위한 물자를 아이티에 지원했다. 적십자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커다란 캠프를 차려 놓고 세계 각국에서 온 적십자 구호단체를 수용해 조직적으로 의료지원, 구호 활동을 펼쳤다.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단 2대 있는 병원선 중 1 대를 보내고, 미 해병대를 보내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군용기로 물자를 실어나르고 환자를 본국으로 수송해 치료해 주었을 뿐 아니라, 미국 내 종교단체와 병원 등이 자부담을 들여 참여한 의료진을 꾸려 아이티로 몰려왔다.

우리나라도 의협과 적십자가 공조해 여러 대학의 지원을 받아 한 달간 의료 지원 캠프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번 지진 피해에는 코로나 상황과 맞물려 엄두도 내지 못한다. 게다가 아이티 치안은 극도로 불안해 국경없는 의사회도 개설한 산부인과 병원을 폐쇄하고 현지를 떠났다.

그나마 지금 아이티에 손길을 내밀고 있는 건, 미국이다. 2010년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이티는 왜 불운이 겹칠까?

아이티는 현재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다. 일인당 GDP 는 700 불 내외이며, 70% 가까운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최악의 실업률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 실업률은 6% 가 안된다. 이것도 이 정부 들어 크게 오른 것으로 보통 3~4% 내외였다.

아이티는 세계사에 유래없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의 독립한 비 백인 국가이다. 그것도 노예였던 흑인이 주도해 무려 나폴레옹 제국과 싸워 독립을 이룩한 국가이다.

아이티는 현지어로 '산이 많은 땅'이란 의미이다. 실제 아이티 국토의 3/4 이 산이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역시 높은 산맥에 둘러쌓여 항구를 낀 분지와 같은 형세이다.

산이 많아 한때 벌목 산업이 흥했는데 지금은 지나친 벌목으로 산에 나무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콜롬버스가 아이티 섬을 발견한 후, 스페인 인들이 섬에 상륙하자, 50만명에 달한 원주민들은 전염병과 학살로 몰살한다. 그러자, 스페인 인은 대서양 건너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와 아이티에서 일을 시켰다. 이들이 현재 아이티 국민들의 선조이다.

이후 유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침공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이른바 9년 전쟁이 벌어지는데, 오스만에 대항해 싸운 건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네델란드, 신성 로마제국, 스페인 등 동맹국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동맹은 프랑스의 참전을 요구했지만, 루이 14세는 오히려 오스만을 도와 동맹과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편입한 영토를 고스란히 반환해야 했고, 대신 아이티 섬의 서쪽 절반을 스페인으로부터 얻어낸다.

그 결과 아이티 섬의 서쪽은 프랑스 어를 쓰는 현재의 아이티로, 동쪽은 스페인어를 쓰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나뉘게 된다.

프랑스는 아이티가 사탕수수와 커피 생산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는 걸 알고, 흑인 노예를 부려 대규모 농장을 꾸려, 당대 최고의 설탕과 커피 생산지가 된다. 18세기 유럽 설탕 소비량 40%, 커피 소비량 70%가 아이티에서 나왔으며, 프랑스 국부의 30~70% 가 아이티에서 나왔다.

이후 미국 독립 전쟁이 벌어지자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 군에 편입되어 미국 독립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미국의 독립은 그 흑인들에게 독립의 의미를 각인시켰고, 이들은 아이티로 돌아와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둘째, 루이지애나를 미국 영토에 편입시킨 공로가 있다.

당시 프랑스는 캐나다 퀘벡과 루이지애나를 식민지로 두고 있었는데,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퀘백과 아이티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당시 프랑스 입장에서 쓸모없는(?) 황무지인 퀘백을 포기하고 돈줄인 아이티를 지키는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후 아이티와의 싸움에서 패전한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을 지켜봐야 했고, 아이티도 못 지킨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해, 토머스 제퍼슨 미 대통령에게 단돈 1500만 달러 (에이커당 42센트), 현재 화폐 기준으로 불과 2억 달러 조금 넘게 받고 루이지애나를 팔아 넘기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예 손을 떼 버린다.







이로써 미국은 영토를 거의 두 배로 늘려버릴 수 있었다. 프랑스가 헐값에 넘겨버린 루이지애나 지역은 미시시피 강이 흐르는 대평원이 포함되어 있으며, 미국이 최대 곡물 생산국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한다.

한때 잘 나갔던 아이티는 왜 최빈국으로 전락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아이티가 독립한 후 독립을 이끈 장자크 데살린은 스스로 총독이 된 후 군주국을 선언하며 곧 나폴레옹을 흉내내 스스로를 자크 1 세라 칭했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든 공화정 파의 과거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암살된다.

이렇게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다시 최고지도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이다가 북과 남으로 각기 분열하여 남에는 
아이티 공화국이, 북에는 아이티 국이 선포되며 남북 분단이 야기된다.

아이티 국은 다시 아이티 왕국을 선언하며 앙리 1세가 즉위하며, 북의 왕국과 남의 공화국이 대립하게 된다. 앙리 1세는 후에 자살한다. 왕국의 국민들이 남쪽의 공화국을 지지하며 반기를 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지만 그 역시 곧 암살 당하게 된다.

이후 아이티는 공화국으로 통일되지만, 이후에도 권력 투쟁으로 암살당하거나 쫓겨나는 대통령이 수십명에 달하며 40 여명의 최고 지도자 중 태반이 임기 1년 미만이다.

이후에도 정권을 빼앗아 왕국을 건국한 이가 또 있었다.

이런 막장 국가에 경제개발 계획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주 소득원이었던 설탕과 커피 역시 재배나 할 줄 알았지 이를 수출할 방법은 몰랐다. 수출은 프랑스인들이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 세기 이후 설탕과 커피 재배국이 늘어나면서 가격은 계속 하락하고 노예를 통한 경작은 효율도 엉망이었다. 아이티는 노예 국가에서 독립국이 되었지만, 노예제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아이티 독립을 인정해 주면서 배상금을 청구했다.

프랑스 농장주의 농장과 노예를 훔쳐갔다는 이유이다. 아이티는 이 말도 안되는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다. 독립전쟁 중 백인 부녀자를 강간하고 고문하는 등 아이티 백인 인종 청소를 벌였기 때문에 국제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1804 Haiti massacre (아이티 대학살)이라고 한다. 이때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프랑스인이 3천~5천명에 달한다.






학대받았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칼을 잡으면 더 잔혹해지는 법이다.

결국 아이티는 1838년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한 후 무려 122년동안 프랑스에 아이티 국가 예산의 80%를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이 배상금을 내기 위해 미국, 독일과 중남미 국가들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다.

1915년 미국은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아이티를 침공해 약 20년간 군정을 펼치기도 했다.

미국은 군정 동안 아이티를 재건하기 위해 헌법을 재정비하고 산업화를 도모했다. 또 재정 지원과 원조를 했다. 만일 아이티가 이 기회를 잘 잡았으면 크게 도약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티 원조는 역설적으로 아이티 몰락을 가져왔다.

아이티의 국토 면적은 약 2만7천 평방 킬로미터이다. 우리나라는 10만 평방 킬로미터이니 남한의 27%에 불과하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아이티는 산이 많은 나라이고 평지 대부분은 농장이라 거주 면적은 상당히 좁아 인구 밀도가 높다.

그런데 인구는 1천150만명에 이르러 세계 32번째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다. 프로토프랭스와 같은 도시는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아이티 빈민가



인구 밀도로 보면, 1900년 아이티 인구 밀도는 평방 킬로미터에 58명 (인구 약 150만명)에 불과했다. 미 군정이 끝난 이후 1950년에는 120명 (약 325만명) 으로 두배 넘게 늘어났다. 1960년에는 143명 (약 386만명) 으로 늘었고, 이후 전세계가 아이티에 원조를 지속하면서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아이티 인구 밀도는 376명 (약 1천15만명) 이 되었다. 약 100년간 인구가 6 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이런 빈국이 이렇게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건 원조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

식량 원조는 중단되는 순간 몰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아이티는 농업 국가이지만, 식량 자급률은 40% 대에 머물고 있다.

인구가 늘면 원조도 늘어야 하는데, 이건 쉽지 않다. 결국 피폐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이를 수 밖에 없다. 누가 정권을 잡아도 그 불만을 꺾기 쉽지 않다.

아이티의 고난은 계속 될 것이다.

지진과 허리케인 같은 자연 재해 때문이 아니다. 아이티에서 지진으로 피해가 큰 건, 성냥갑처럼 턱없이 부실하게 지은 건축물 때문이다. 아이티 지진으로 파괴된 건물은 모두 샌드위치처럼 포개져 부서진다. 대규모 지진으로 피해가 많은 나라에서 내진 설계나 시공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허리케인에 의한 손실도 무차별적인 벌목과 허리케인에 대한 대비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같은 섬에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은 똑 같이 허리케인을 맞아도 아이티와 같은 피해를 보지 않는다.

아이티의 역사를 보면, 국가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국가 체계가 완전히 잡히면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국가 수준이 어느 정도 오를 때까지는 권력 투쟁이 아니라,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물론 국민의 수준도 매우 중요하다.

노예 국가였던 아이티는 독립한 후에도 노예제를 유지하고, 심지어 도미니카 공화국에 침입해 노예처럼 부리기도 했다.

맞고 큰 자식이 자기 자식도 때리는 법이다. 그 근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아이티, 아프간, 리비아, 베네주엘라 등 자구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자립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국가, 국민, 사람은 아무리 도와줘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한다.

해방 후 한국이 불과 3년 만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설립하고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강인한 지도자를 만나 새마을 운동을 통해 국민성을 개조해 성실 근면해지고, 중공업 국가로 일어서 그 덕에 세계 10위권 경제국이 될 수 있었던 건 한 마디로 기적이다.

그걸 모른다.


2021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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