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식 문제는 사라질까?




“달마다 24일은 학교를 가야 한다. 지겨운 학교.”

놀랍게도 이 글을 쓴 학생은 지금의 중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다.

기원 2000년 전,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던 어느 수메르 학생이 서판에 적은 낙서이다.

당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살던 수메르 인은 쐐기 문자를 발명했고, 글을 쓸 필경사 (두브사르. dub sar)를 양성할 학교 에두바(edubba)를 운영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인류 역사와 함께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 기관은 늘 존재했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교육이 시작된 것은 불과 몇 세기 전이다.

즉 수천 년의 인류 역사 동안 교육은 특정인들을 위한 전유물이었을 뿐이며, 근대에 이르러서야, 대중에 대한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교육이 의무화되고, 교육받을 권리가 생긴 것도 오래되지 않는다. 지금도 교육에서 배제된 어린 학생들이 지구 상에는 넘쳐나고 있다.

특히 집단적 학교 교육이란 정형적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교육 구조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그러나 적은 자원을 투입해 많은 피교육생을 교육하는 효율적 방법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해 보인다.

더 명확한 사실은, 우리는 여전히 집단적 학교 교육이란 방식의 매우 초창기에 머물고 있다는 것과 학교 교육의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 교육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 지식 즉, 읽고 쓰기, 산수, 질서와 예절, 법 등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교육의 본질은 외면되고, 교육은 어느 순간 경쟁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교육은 시험으로 평가되고, 시험은 객관식 문제 출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객관식 문제는 사실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방식이다. 그런데, 여러 문항에서 답을 골라내는 능력이 그의 지식 수준을 측정하는 가장 이상적 방식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객관식 문제가 선호되며 널리 이용되는 이유는 다수의 피교육생을 동시에 평가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효율적이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관식 평가나 대면 평가와 같은 다른 방식의 평가는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있어 평가 결과에 대한 반론을 피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기도 하다.

따라서 대중 교육이 존재하는 한, 객관식 평가는 여전히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대중 교육의 문제는, 대중 교육의 방식에 매몰되면서, 수 많은 청춘들의 수 많은 시간과 수 많은 재원이 “의미”없이 소모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치원을 포함해 약 13년 이상의 교육 기간 중 실제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데 필요한 기초 교육은 사실 1,2년이면 끝난다.

나머지 10년 이상의 시간은 좋게 말하면, 심화 교육을 위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경쟁을 통해 등수를 매기고, 대학이라는 고등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학교 교육의 이 같은 맹점을 간파한 이들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 교육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른바 대안 교육, home school 등이 그 예이다.

아예, 학교 교육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예체능에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한 경우, 학교 교육은 쉽게 포기된다.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학교 생활에 대한 환상 외에 학교 교육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어 보인다.

독일과 같은 나라는 이미 1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반복 교육, 심화 교육, 경쟁 교육으로 소모하는 것에서 벗어나 일찌감치 직업 교육을 시작한다.

반면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넣는 순간, ‘대학에 갈 때까지’ 무조건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학교 교육을 마치지 못하면 사회와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갖는다.

그러면서 사실 대부분의 부모들은 학교 교육은 등한시하고, 오히려 학원 교육에 더 열정을 쏟고 돈을 투자하는 모순에 시달리는 것이다.

“왜 집에서 빈둥대느냐? 거리에서 방황하지 말고 학교에 가라!”





이 말 역시, 기원전 1700년경 필경사였던 아버지가 딴청 피우는 아들을 생각하며 점토판에 쓴 글이다.

현재의 부모들이 갖는 자식이 학교를 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이 학교를 빠지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것이다.

부모가 걱정하는 건, 자식이 경쟁에서 뒤쳐져 좋은 대학을 못하고, 그래서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고, 그래서 나중에 나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이 무능하면 나에게 손을 벌리고, 그래서 내 노후가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학교 교육을 잘 받으면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단순한 생각’이 어쩌면 아이들을 버려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의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을 얻는다는 등식은 늘 성립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 바람직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단순한 일방적 생각’은 자식에 대한 게으른 생각이며,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이 자녀를 진심으로 위하는 교육인가? 무엇이 자녀에게 사회 생활을 바람직하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한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그 방식과 목표, 교육 기간과 교육 내용 등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

대학도 마찬가지이다. 학자를 양성할 것인지, 직업 교육을 할 것인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방식과 교육 내용을 고수할 경우, 수 많은 젊은 청춘을 소모하고 고급 놈팽이를 양성하고 국력을 약화시킬 것이 뻔하다.

나아가 학교 교육에 대한 이탈을 가속화하여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유일한 자원이다.
어린 학생들은 우리의 꿈이며 미래이다.

그런데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교사라는 이름으로 그 중요한 자원과 우리의 미래를 망가트리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2014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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