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은 뭘 했나? -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에 대해 -



의협은 뭘 했나?

-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에 대해 -


다른 건 그만 두고라도, “포퓰리즘적인 졸속 입법” 이란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면, 의료분쟁 조정법 개정은 이미 2014년 초부터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을 신해철 법이라고 부르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신해철 사망 사고가 이번 법 개정에 크게 연관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뿐더러, 법 개정은 그 전부터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의료분쟁조정법은 27년의 공전 끝에 만들어진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입법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나도 쟁점 사항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조정전치주의>이다. 조정전치주의는 소송 전 모든 분쟁을 우선 조정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의료계는 조정전치주의에 반대했고, 반대쪽은 조정전치주의 채택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의료계 주장대로 <임의적 조정전치주의>가 입법화되었고, 그 결과, 신청인 (환자 혹은 그 가족)이 조정 신청을 하고, 피신청인 (의사 혹은 병원)이 조정에 동의를 해야만 조정 절차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막대한 정부 예산이 투입되어 의료분쟁조정원이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신청인이 조정에 응하지 않아 실제 조정 신청 건수는 미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쟁조정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있어 왔다.

조정전치주의로 전환하는 최초의 법안은 당시 보건복지위원장인 오제세 의원이 2014년 3월에 발의하였다.

그 제안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행법이 2012년 4월 8일 시행된 이래로 한국의료분쟁조정원은 의료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조정중재업무를 시작하여 2013년 3월말 현재 조정신청된 804건 중 40.2%가 조정개시되었음.
그러나 언론중재위원회,환경분쟁조정위원회 및 한국소비자원 등의 분쟁조정제도와 달리 현행법상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경우 신청인이 조정신청을 하여도 피신청인의 동의여부에 따라서 조정절차의 개시가 좌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청인이 부당한 목적으로 조정신청을 하여도 이를 종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는 등 의료분쟁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가 어려운 실정임."

이에 대한 당시 입법조사처 정재인 전문위원의 보건복지위 보고 내용이다.

"오제세 의원님이 대표발의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안입니다.
이 개정안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만 보고를 드리면 개정안은 분쟁조정 신청 시에 자동으로 조정절차를 개시토록 하고 있습니다. 
현재 피신청인의 조정 참여율이 41.4%에 그치고 있고 조정절차가 당초 예상과 달리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의 신속한 구제, 분쟁조정의 활성화 그리고 실효성 있는 분쟁조정을 위해서 개정안은 필요한 입법조치라고 판단이 됩니다. 
참고로 피해구제 및 분쟁조정 관련 법률에서는 피신청인의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조정절차가 개시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입법례다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11일(금). 제 323회 보건복지위원회)

<분쟁조정의 활성화>를 위한 입법해야 한다는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역시 2015년 11월 3일 김정록 의원 등이 발의한 개정안의 제안 이유를 보면,

"현행법은 보다 원만한 의료분쟁의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2012년 4월 8일 시행되었으며, 의료분쟁에 대한 조정중재 신청건수는 2013년에 1,398건, 2014년에 1,895건, 2015년 8월 말 기준 1,189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음. 
그러나 증가하는 신청건수에도 불구하고 2015년 현재 조정중재 개시율은 평균 43%에 불과하여 조정중재제도의 운영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며, 이외 동 제도의 운영상 미비점을 개선함으로써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를 보다 신속·공정하게 구제하고 보건의료인의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음. 
법 개정이 필요한 주요사항으로는 첫째, 조정신청의 개시여부가 피신청인의 동의여하에 달려있어 신청인의 정당한 조정신청에도 불구하고 조정절차를 개시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음."

이라고 하고 있다.

즉, 조정중재는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데 비해, 조정중재 개시율은 여전히 40% 대 초반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법 개정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오제세 의원안이나 김정록 의원 안은 완전한 조정전치주의 채택이었다. 즉, "신청인이 조정을 신청하면 피신청인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조정 절차를 개시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전치주의 채택은 애초 이 법을 만들 때 의료계와 입법부가 동의한 사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담인지, 애초 원안의 조정전치주의 적용 대상을 사망 혹은 중상해로 제한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사망 혹은 중상해로 제한한 것은 <반의사불벌>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형법 중 업무상과실치상죄에 해당하는 의료사고일지라도 조정이 성립되는 경우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한 법 조항이 있는데, 그 예외는 피해자가 신체의 상해로 인하여 생명에 대한 위험이 발생하거나 장애 또는 불치나 난치의 질병에 이르게 된 경우인데, 이는 곧 사망 혹은 중상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제51조(조정성립 등에 따른 피해자의 의사)

① 의료사고로 인하여 「형법」 제268조의 죄 중 업무상과실치상죄를 범한 보건의료인에 대하여는 제36조제3항에 따른 조정이 성립하거나 제37조제2항에 따라 조정절차 중 합의로 조정조서가 작성된 경우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다만, 피해자가 신체의 상해로 인하여 생명에 대한 위험이 발생하거나 장애 또는 불치나 난치의 질병에 이르게 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즉, 환자가 사망하거나 중상해에 해당하는 경우는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형사 책임을 묻게 되며, 이 같은 의료 사고의 경우, 피신청인 즉 의사의 동의와 무관하게 우선 조정을 받으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의협이 “총선 앞둔 포퓰리즘적 졸속 입법”이라고 주장하는 건, 의료분쟁조정법 개정 움직임에 대해 소홀히 대처한 것에 대한 면피용 발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조차 없었다”고 비판하지만, 2년 가까운 입법 움직임에 도대체 뭘, 어떻게 대처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조정중재원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초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방적으로 조정전치주의를 채택하려는 입법부의 무소불위적 입법 행태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조정중재 개시율이 40%대에 불과한 것은 의료계가 조정중재원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 같은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체 강제적으로 조정에 임하도록 법제화 하는 건 폭거와 다름 아니다.

입법 만능주의의 만연으로 의사의 양심과 의학적, 도덕적 기준을 따라야 할 사항들이 각종 법령으로 규율되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다.

의사의 모든 행위를 계량화, 표준화하려고 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재단하고 통제하며, 이를 조금이라고 어긋나면 처벌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현 실태이다.

그러나 의료 행위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체는 부서진 자동차 범퍼를 교체하듯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으로 다치기 전과 같아지지도 않는다.

의료행위는 근본적으로 '선의의 행위'이며, 누구도 악의적으로 환자를 해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깔려 있지 않는 한, 의료 행위의 결과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조정중재의 문턱이 지나치게 낮을 경우 불필요한 조정중재가 남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최근 드러난 주사기 사건처럼 어이없는 사건이나 잘못 교육받은 (malpractice) 의사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을 처벌하는 것을 막거나 이들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워서도 안 된다.

절대 다수의 선한 의사들을 마치 잠재적 범죄자인양 취급하고, 의료사고 조정중재를 남발하도록 방치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201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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