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 라인과 국정 농단


옐로우 저널리즘에 찌든 미국판 신문에서 사진 인용



페이스북, 인터넷은 물론 야당 정치인들의 입에 “국정 농단”이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요지는 박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연설문을 미리 보내 손보게 하였고, 주요 국정 사항 역시 최순실의 입김대로 결정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며, 이것이 국정 농단이라는 것이다.

자문을 구하고 해 줬으니 국정 농단이다? 이 셈법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국정 농단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는 걸까?

농단(壟斷)의 농(壟)은 구릉, 언덕을 의미하며, 단(斷)은 낭떠러지를 의미한다. 즉, 농단은 남들보다 높은 지리적 위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후좌우를 잘 살필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서 돌아가는 정세를 남들보다 유리하게 알 수 있어, 이익과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농단은 맹자의 공손추에 나온 용어이다.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 국정 농단의 사례가 나온다.

드라마 속 미국 대통령인 개릿 워커는 억만장자 사업가인 레이먼드 터스크에게 심하게 의존했다.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내각과 참모들과 국내외 정세를 논하다가도, 이들을 물리치고, 레이먼드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결정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며, 수시로 그를 백악관을 불러 자문을 구한다.

뿐만 아니라, 부통령을 비롯해 요직에 임명할 사람들 역시 레이먼드의 입김에 따라 정해졌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프랭크 언더우드 역시 레이먼드의 조건(즉, 자신의 중국 관련 사업을 도와주기로 하는)을 수락하고 부통령으로 임명된다.

레이먼드가 대통령에게 자문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이다. 쉽게 말해, 바둑판에 돌을 놓듯, 자신의 사업에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정책을 결정하게 하고, 요직에 인물을 임명하도록 대통령을 조정한 것이다.

물론, 드라마지만, 이 정도 돼야 국정 농단이란 단어가 어울린다.

그런데, 과연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역사적으로 볼 때 수 많은 군주들, 현재의 대통령들 등 국가수반에 앉아 있는 이들의 공통점은 “비선 라인”을 가동한다는 것이다.

차이는 그 라인의 굵기와 연속성일 뿐이다.

또 대통령뿐이 아니다. 재벌의 총수, 협회의 회장, 각종 단체장 등등이 모두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비선 라인을 가동하는 공통적인 이유는 법과 규정에 따라 합법적인 참모들을 거느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며 주변의 참모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권력자에 대한 충성 경쟁에 따라 온당하지 않은 조언을 한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로지, 동지애, 우정 혹은 핏줄이라는 “순수”한 관계로 맺어진 이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행위를 하는데, 이를테면 the Second opinion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아예, 동생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해 지근거리에 두면서 의견을 들었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역시 자기 부인인 힐러리에게 조언을 얻었을 뿐 아니라, 1993년에는 의료개혁 위원회(Task Force on National Health Care Reform)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미국 의료개혁 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물론, 힐러리가 주요 국가 정책의 핵심 요직에 앉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의료제도 전문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주요 정책 결정에 아들 부시의 의견을 묻지 않았을까?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 부시의 자문을 구하지 않았을까? 이 둘은 모두 중동에서 전쟁을 일으킨 바 있다.

이른바 “비선 라인”을 두고,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이들을 활용하는 것이 부도덕하고, 비난 받을 일이라면 이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력자는 아마도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또, 비선 라인을 두는 것과 이들이 국정 농단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대통령 혹은 권력자라는 언덕에 올라서서 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거나 권력을 휘둘렸다면 이건 분명히 국정 농단이라고 해도 좋고, 비난받아 마땅하며, 처벌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 국정 농단의 스캔들에서 자유로운 대통령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이승만 대통령의 이기붕은 물론이고, 박정희 대통령도 수많은 비선 라인을 가동 했다.

박 대통령은 군인들의 애국심, 충성심을 믿었고, 그들의 전우애도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행정부에 속하지 않은 군인, 군인 출신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들을 발탁하기도 했다. 포철의 박태준도 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외에 명망있는 학자, 교수들을 수시로 불러 의견을 듣고, 그들에게 임무를 주었다. 비선 조직을 통해 국정 운영에 도움을 준 긍정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의 권력 뒤에서 꿀물을 빤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정주영 회장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비선이라면 비선이었고, 정주영 회장은 개발 시대에 박정희라는 농단에서 서서 국내 최고의 재벌이 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박대통령에게 특혜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그를 욕하는 이는 별로 없다.

반면, 노태우 대통령의 박철언, 이명박 대통령의 이동관, 노무현 대통령의 이광재, 여택수 등등은 측근 가신이면서 호가호위 즉, 모두 국정 농단으로 주목 받았고, 소통령이란 불렸던 대통령의 아들들, 즉, 김영삼 대통령의 김현철, 김대중 대통령의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모두 국정 농단을 하다가 구속되었다.

김대중 시절의 진승현, 정현준, 이용호 3대 게이트는 물론 최규선 게이트, 옷 로비 사건 등등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언덕에 서서 이권을 챙기려고 한, 국정 농단사건이었다.

대통령의 아들 뿐인가,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노무형 대통령의 형 (노건평),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전경환) 모두 자신의 형제들의 권력에 기대어 국정 농단하다가 구속 기소되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권력에 기대어 이권을 챙겼거나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렸다(호가호위)는 것이다.

재야 정치인 김영삼의 자택, 상도동의 출입기자였던 이는 김영삼이 “오야붕” 정치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김영삼이 긴 재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마치 건달 조직의 오야붕처럼, 꼬봉들을 보살펴 주더란 이야기로 YS를 추켜 세운 것이다. 그 기자 보기에 오야붕-꼬봉 정치가 보기 좋았나 보다. 그 기자는 결국 YS 쪽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과거의 재야 생활을 오래했던 정치인들은 사방에 신세를 지고 살았다. 자신 손으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으니 재산가와 기업인의 돈이 필요했고, 배를 곪아가며 꼬봉 역할을 한 이들도 모두 챙겨 주어야 했다.

대통령의 월급으로는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주요 자리에 앉혀 주고, 그 자리의 월급으로는 성이 차지 않으니, 권력으로 이권을 챙겨 주었다. 물론 모두 불법 행위일 터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한 386, 운동권들은 어땠을까? 권력을 잡았으니, 이제 다들 생업으로 돌아가자 했을까? 그들은 대통령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상상에 맡기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최순실이란 여자가 만일 남을 갈취해 이권을 챙겼고, 그 어떤 불법 행위를 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이미 온 국민이 그 여자를 다 알고 손가락질 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가 한 행위보다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 여자뿐 아니라, 이건 사건에 개입하여 불법을 저지르며 호가호위한 인물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 여자가 저지른 범죄 규모가 크기 때문이 아니다.

왜 대통령이 국정에 대해 그 같은 여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연설문을 수정받았느냐는 것이다.

이점을 비난하는 개중에는, ‘왜 “나”에게 묻지 않고.’ 라고 애석해 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위 비선이라는 건, 꼭 특출난 전문가이기 때문에 비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따로 불러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구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정도이다.

언급했듯, 비선 라인, 즉, 비공식적 그룹은 철저한 동지애, 애뜻한 우정 혹은 핏줄이라는 “순수”한 관계로 맺어진 사이에서 말 그대로 계급장 떼고, 형, 동생, 야, 너, 혹은 언니라고 부르고 불릴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서둘러 사과했다.
왠만하면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사과는 커녕 기자회견도 잘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늘 “불통”의 대명사로 불렸다.

다른 대통령들이 저녁에 사람을 불러 술을 마시며 “소통”하는 그 시간에 도대체 박 대통령이 무얼 하는지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그 사과를 두고, 진정성이 없네, 최순실 덮어주기 사과네 또 비난이 많다.

하지만, 1 분 남짓 대통령의 얼굴을 보는 동안, 외로움에 치를 떠는 초로의 한 여성이 보였다.

분명한 사실은, 비선 라인을 갖춘 것과 누군가에게 국정 운영의 자문을 구한 것과 국정 농단에 대한 비난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야네, 탄핵이네, 수렴청정이네 하는 용어가 너무나 쉽게 나온다.

비난은 쉽다. 조롱은 더 쉽다.
아무리 쉬워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뭘 주장하는 건지, 되돌아 볼 줄 알아야 개 돼지가 아니다.

최순실을 앞장 세워 대통령을 물고 뜯는 이들의 순수성이 의심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무리 고고해 보여도, 절대자는 아니다. 누구보다도 아픈 생애를 살았던 가녀린 한 인간일 뿐이다.


2016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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