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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톰린슨과 Kettling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의 칼럼은 백남기 씨 사건에 관련한 언론인의 글 중 가장 돋보인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측도 있을 것이다. 오마이 뉴스는 이 칼럼을 놓고 “유가족을 물어 뜯으며, 최악의 막말 보도를 한다”고 비난했다.

송평인 위원이 소개한 이안 톰린슨(Ian Tomlinson)의 사례는 백남기 씨 사건과 많은 부분에서 아닌 듯 닮아 있다.

아닌 점은 톰린슨은 시위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단지 술에 취한 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CCTV 등을 보면 집으로 가기 위해 여기 저기를 배회하였지만, 경찰의 저지에 막혀 갈 수가 없었다.


사망 직전에 촬영된 톰린슨의 모습



그런 톰린슨을 시위대로 오인한 경찰 Simon Harwood은 뒤에서 톰린슨의 다리를 곤봉으로 가격하고, 밀쳤다. 톰린슨은 팔꿈치를 대고 앞으로 고꾸라진 후 그 자리를 벗어나 60 미터 쯤 가다가 쓰려져 사망했다.

영국 경찰 Simon Harwood


최초 런던 경찰은 톰린슨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또, 구조대가 그를 구하려고 하는 과정에 시위대가 방해하여 사망했으며, 방해하지 않았으면 살릴 수 있었다는 뉘앙스를 품겼다.

그러나, 신문 가판원이었던 톰린슨이 팔던 신문 이브닝 스탠더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려는 동안, 경찰이 벽돌로 공격했다. (Police pelted with bricks as they helped dying man)”는 제목의 기사를 내 보내며 톰린슨의 죽음에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이 기사가 틀렸다고 주장했으며, 경찰 발표와 이브닝 스탠다드 기사 양쪽에 의문을 품은 가디언 지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당시 상황을 본 목격자와 사진, 동영상 등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결국 뉴욕에서 온 투자 전문가인 크리스 라 조니(Chris La Jauni)가 촬영한 동영상을 입수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경찰 행동의 결과로 톰린슨이 사망한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런던 경찰에 의해 시행된 첫번째 부검의 부검 의사는 Freddy Patel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잠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으로 건너온 검시의였다. 


Dr. Freddy Patel


그는 톰린슨이 관상동맥질환으로 자연사했다고 사인을 명시한 보고서를 썼는데, 그 보고서 중에는 “복강 내에 피가 섞인 약 3리터의 복수가 있었다 (intraabdominal fluid blood about 3L with small blood clot)”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두고 후에 그는 “복강으로 3리터의 피가 출혈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복수가 찼으며, 피가 일부 섞였다는 의미이다.”라고 덧붙혔다.

가디언 지의 의혹이 기사화된 후 피살 가능성을 염두에 둔 톰린슨의 가족에 의해 또 다시 부검이 진행되었으며, 새 부검의는 톰린슨에게는 간경화가 있었고, 간 주위의 충격에 의한 출혈로 사망하게 되었다고 부검 보고서를 썼다.

첫 두 번의 부검 결과가 충돌하자 런던 경찰국 측과 가해자로 지목된 경찰 Simon Harwood 측을 대표하는 의사들이 동시에 참가한 세번째 부검이 이루어졌으며, 양측 의사들은 두번째 부검 보고서 즉, 복강내 출혈에 의한 사망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해자인 경찰 Simon Harwood은 부검 결과에 따라 처음에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2011년 과실 치사(manslaughter)로 기소된 후 1년 후 무죄석방된다. 이후 중대 과실(gross misconduct)을 이유로 경찰직에서 해고되었다.

한편, 첫번째 부검을 시행한 Freddy Patel은 검시의의 업무가 정지되었고 곧이어 의사 면허도 박탈되었다.



이 사건이 영국 사회에 던진 시사점은 매우 많다.

첫째, 영국 경찰도 사건을 축소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의 사건이 아니라 2009년에 있었던 사건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둘째, 시위 진압의 양상이 바뀌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시위대 제압 방법으로 Kettling (corralling이라고도 함)이라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Kettling에 대해서는 아래에 첨언키로 한다.), 이 사건 이후 영국왕립경찰사찰단(HMIC. Her Majesty’s Inspectorate of Constabulary)은 심리학자인 클리포드 스톡(Clifford Stott)에게 시위 군중 통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연구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시위에 적응하기(Adapting to Protest)”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방법은 경찰과는 다른 제복을 입은 연락 경찰을 시위대에 들여 보내 시위대와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이 방법이 효과가 있었을까?

스톡에 의하면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50회 이상 연락 경찰이 투입되어 성과를 거두었으며, 앞으로 영국 내 모든 시위에 연락 경찰이 투입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였다.

그러나, 스톡 그 자신은 시민 단체들로부터 “국가 공인의 세뇌 기술로 사회운동을 약화시키고 있다”며 배척 당했다.


셋째, 저널리즘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가디언 지는 소위 Open Journalism 이라는 새로운 취재 방식을 도입했고, 소셜 미디어와 기성 매체가 경쟁 관계일 뿐 아니라, 서로 시너지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부검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시켰다.

이미 우리는 민주화 과정에서도 부검을 통해 진실을 밝혔던 몇 번의 경험이 있었고, 톰린슨 사건에서도 최초 부검의가 영국 경찰의 사주를 받아 부검 결과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톰린슨 사후 4시간 만에 런던 경찰국의 최초 언론 발표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남자가 쓰러지자 구하려고 하였고, 이 때 시위대에 의해 공격받았다”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 런던 경찰국은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첫번째 부검을 한 Freddy Patel는 톰린슨이 “시위대에게 질서를 유지시키려던 중 발견된 의심스러운 죽음”의 케이스라고만 알고 부검을 했다는 것이다.

즉, Freddy Patel은 그가 외상이 아닌 길거리에서 쓰러진 어떤 이를 부검하는 줄 알았고, 자연사로 결론지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Freddy Patel이 런던 경찰의 사주를 받고 외인사를 자연사로 부검한 것이라면, 그가 직장을 잃고 나아가 의사 면허까지 박탈당했을 때 사주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부검 감정서는 정치적 수사(修辭)나 판사의 판결문이 아니라 의학 행위의 과학적, 객관적 관찰 보고서이다.

몰라서 틀리게 기록할 수는 있어도 정치적, 이념적으로 기록 되지는 않는다.

과학적 사실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한편, Simon Harwood이 무죄로 석방되자 톰린슨의 유족들은 런던 경찰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고, 영국 경찰국은 "Simon Harwood의 지나치고 불법적인 위력의 결과로 이안 톰린슨이 사망하고, 그 유족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며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공개되지 않은 금액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Kettling 에 대하여




우리는 때로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유럽의 경찰관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비하게 곤봉을 휘두르거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곤 하는데, 대개 이 경우는 경찰이 쳐 놓은 방어선(Police line. 흔히 cordon이라고 함)을 시위대가 침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토론토에서 G20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제압하는 캐나다 경찰


Kettling은 이처럼 넓은 지역에 방어선을 치고, 제한된 지역 안에 시위대를 가두는 것이다. 이 경우 시위대는 시위를 포기하고 경찰에 통제 아래 그 지역을 벗어나거나, 음식이나 물, 화장실 등을 사용하지 못한 체 무한정 그 자리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Kettling이라는 봉쇄 전술을 펼치는 건, 시위 도중 질서를 유지하고, 약탈, 폭행과 같은 폭력적 행동으로 부터 일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시위라 함은 비단 민주적 시위나 비폭력적 시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가 모여 군중을 이루면, 군중은 대개 폭력적 속성을 갖게 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통제받지 않는 군중이 폭도로 변하거나 약탈, 파괴 등을 벌이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시위대는 대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경찰 혹은 경찰의 진압에 대한 불만도 있는데, 그래서 경찰이 개입하면 더 폭력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Kettling이 시위를 통제하고 대중에게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도심 시위 통제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이며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Kettling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봉쇄 방법은 음식이나 물을 섭취하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등 비인격적이며, 경험이 없는 경찰들이 겁에 질려 지레 폭력을 행사하게 하며, 방어선을 칠 경우 시위자 뿐 아니라, 행인이나 구경꾼마져도 봉쇄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실제, 2001년 런던에서 벌어진 시위에 런던 경찰국은 Kettling 전략을 써서, 옥스퍼드 서커스 주변을 7시간 동안 감쌌는데, 이 같은 시위 통제 방법을 놓고 유럽인권보호조약 제 5조를 어겼다며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한 바 있다.

그러나, 2012년 유럽인권재판소는 영국 경찰의 Kettling 방법은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Article 5 did not have to be construed in such a way as to make it impracticable for the police to fulfil their duties of maintaining order and protecting the public."
(인권 보호 조약 제 5조가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대중을 보호하는 의무를 하는데, 실행 불가능하도록 해석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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