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원회 공화국, 대한민국 위원회의 애증





위원회 공화국, 대한민국 위원회의 애증

무엇에 근거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소위 인구당 <위원회> 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네델란드라고 합니다. 정말 그런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마도 네델란드 사람들의 성향 (민족성)과 합의제를 추구하는 네델란드 정치성 때문인 듯 합니다.

오죽하면,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던 그 순간, 이미 배에 타고 있던 네델란드 사람들은 <대책 수립과 보상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전해 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그런 네델란드 사람들을 찜 쪄 먹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위원회>는 사실, 사형수를 세워 놓고 여러 명이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단 한 발의 총알이면 죽일 수 있는데도 여러 명이 총을 쏘는 건, ‘자신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 즉,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면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위원회를 이런 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너무 비아냥하는 것이 아니냐고 발끈할 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위원회는 사실 이미 <사형 선고>된 사형수의 사형 집행을 하듯, 이미 내부적으로 상당 부분 결정된 사항에 합법적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절차적 과정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특히 법으로 규정되어 만들어지는 민관 합동 위원회는 거의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원래 위원회란 합의체이며, 의결기구여야 하는데, 그 목적에 합당하도록 원점에서부터 어떤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실질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다는 이야기이지요.

다수의 서로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위원들이 참여하는 위원회의 경우,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면, 당연하지만 <설득의 미학>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때 중요한 무기는 <논리>와 <근거>입니다.

때론 논리와 근거로 아무리 무장을 하여도, 상대가 막무가내라면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물론 다수결에 의해 아젠더의 향방을 정하는 경우라면 또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대부분의 위원회는 표결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표결 하더라도, 표결 전까지 가능한 많은 위원을 설득하려면, 단지 논리와 근거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병아리 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혹은 유치원 아이들을 관찰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처음에는 비슷한 양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중에는 자주 말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고, 다수는 그 소수들의 말을 듣게 됩니다. 병아리 떼나 어린 아이들 사이에도 똑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위원회란 조직 또한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동등하게 말하고 의견을 주장할 것 같지만, 사실 위원회가 거듭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미분화된 세포가 분화되면서 세포의 역할이 정해지듯, 어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이야기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주로 듣기만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 위원들의 포지션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협상가, 설득자는 말을 많이 하는 소수가 되어야 하는데, 흔히 우리는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리더라고 부릅니다.

동등한 입장이어야 할 위원회에도 리더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은 수의 말을 하더라도, 말의 무게와 중요도, 높은 설득 수준을 갖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위원회를 리드하려면, 물론 가장 중요한 논리와 근거가 있어야겠지만, 때로는 웅변과 강한 제스쳐와 돌출 행동도 필요하기도 합니다. 돌출 행동은 이목을 사로잡는데 극적 효과를 주기 때문입니다.

돌출 행동이란 이를테면 연합 작전을 펴거나, 특정인을 공격하거나, 회의 퇴장을 선언하는 것 같은 어찌 보면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리더가 되어 회의를, 위원회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만일, 어떤 위원회가 서로 잘 알며, 자주 만나는 사람들, 그래서 서로의 공력과 수준을 잘 알고 있는 경우로 구성되는 경우에는 이미 리더가 정해져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리더들을 <선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수들은 대부분 이런 위원회에서 협상을 전문적으로 하거나 자주 해 왔던 인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프로인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위원회의 또 다른 문제 중 하나는 이런 프로 선수들이 여기 저기 위원회에 참석하며, 전혀 이런 세계를 접해보지 못한 마치 갓 입학한 유치원 어린이나 갓 태어난 병아리 같은 신입 인물들을 말 없는 다수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들의 이익 구조에 따라 위원회 결과를 이끌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프로 선수들을 내세우는 경우는 이익단체이기도 하지만, 소위 NGO로 불리는 시민단체들인 경우도 많고, 대학교수들 통칭되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애초에 추구해야 할, 동등한 입장에서의 합의 기구로써의 위원회는 애시당초 그 역할을 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위원회가 새로운 합의점을 정하고 이를 근거로 법이 만들어지거나, 제도가 바뀌게 되었을 때, 그 새로운 법과 제도에 따른 문제점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결정은 (프로 선수건 아니건) 리더 역할을 한 그 누군가가 내린 것이 아니라, 위원회가 내린 것이며, 이것은 마치 누구의 총알을 맞고 죄수가 죽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애당초 죄책감 따위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이것이 위원회 공화국, 대한민국의 서글픈 오늘 날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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