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흉한 군심, 분노하는 장교들







헌정 사상 최초로 직무 중인 대통령이 탄핵에 의해 자리를 물러날 수 있는 위중한 상황이 벌어졌고,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국가 안보를 위협할만한 사태의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를 미리 대비하고 계획을 짜 두는 건, 당연한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보도에 의하면,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은 "위중한 상황을 고려해 위수령과 계엄을 검토할 것"을 기무사 사령관에게 지시했고, 지시를 받은 기무사 사령관은 참모장 등 실무자들을 불러 이 같은 지시를 전달했다.


지시를 받은 실무자들은 두 가지 문건을 작성했는데, 하나는 "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8 쪽 짜리 문건이며, 다른 하나는 "대비 계획 세부자료"라는 67쪽 짜리 문건이다. 이 문건은 검토 후 봉함되었다.

대비 계획 세부자료는 "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에 대한 배경 설명 즉, 과거 사례, 관련 법령, 구체적 절차와 수행 방법, 과거 사례의 예시 및 만일 실제 위수령 등을 발동할 경우를 가상한 각종 문건 등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2 가지 점에서 큰 실수가 있었다.

첫째는 과거 군사 쿠테타로 정권이 두번이나 바뀐 역사가 있는 이 나라에서 위수령 혹은 계엄령이라는 예민한 사항을 검토하면서, 검토의 타당성과 그 배경 및 이유를 명확하게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의 이 사태는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실무자들의 실수이다.

만일 이들이 첫번째 문건 즉, "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문건만 작성했더라도, 마치 전 정권이 친위 쿠테타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나친 열정과 과욕으로 불필요하게도 마치 계엄을 준비하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구체적 절차와 각각의 절차에 사용될 문건까지 지나치게 세밀하게 작성하는 우를 범했다. 물론, 이들은 위수령이나 계엄령이 발동되기 위한 조건도 명시해 두었으므로 이 문건으로 오해를 받을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당연히 이들은 이 문건이 가상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검토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문건을 작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를 악용하려고 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자기 입맛에 맡게 상황을 조작하기에 충분한 여지를 남기는 우를 범한 것이다.

결국 정권이 바뀌고 난 후 이 문건은 뒤늦게 문제의 소지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한민구 국방장관은 이 문건 작성의 이유가 '국회의 요청'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문건 작성은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요구가 아니라 국회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이 문건을 세상에 공개한 이 역시 국회의원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민구 장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회의 누군가 이 같은 문건 작성을 요구했고, 이 문건의 실체를 알고 있는 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를 공개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24일 열린 국회 국방위에서 벌어진 국방장관과 기무사 대령간의 진실 공방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를 담당하는 기무사 대령은 국방부 실·국장 간담회에서 국방장관이 "위수령 검토 문건(계엄령 문건)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내가 법조계에 문의해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직권남용에 해당되는지 검토해보기 바란다."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국방장관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해당 기무사 대령은 그 간담회 발언 녹취록(발언록)이 있다며 이를 공개하겠다고 하고, 오늘 국회 국방위에 제출했다. 국방부는 즉각 대변인을 통해 그 녹취록이 조작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해당 기무사 대령은 24일 국방위 참석 전인 23일 이미 전역지원서를 제출해 둔 상태이다.

한마디로 기무사 대령은 배수의 진을 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그는 왜 별을 달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스스로 옷을 벗을 각오로 이런 발언을 한 것일까?

추측컨대, 기무사 소속 실무자들은 억울할 것이다.

위의 지시를 받아 최선을 다해 문건을 작성했다. 군을 비롯해 중앙부처가 재난 등 위기 상황을 대비해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건 일상적인 것이다. 폭력 사태나 폭동이 발생해 경찰력으로 치안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 헌법과 계엄법 등은 사회 질서를 잡고, 국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위수령, 계엄령을 발동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치안의 문제가 생길 경우를 미리 대비해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두는 것이 위법하다고 생각할 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과거의 충성스런 행동이 국가를 배반하고 마치 역모를 꾀한 것처럼 간주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지금, 계엄령 검토 매뉴얼을 이슈화하는 건 누가 봐도 이를 빌미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고, 동시에 기무사령부를 무력화하고 군을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국방장관은 처음에는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대령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때문에, 국방장관은 지휘관이 있는 자리에서 위수령 검토 문건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을 것이다.

기무사는 장관을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장관의 의지가 대통령의 의지와 달라 장관이 궁지에 몰리자 말을 바꾸었고 이에 실망한 장교들이 하극상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작금의 시대는 가히 혼돈의 시대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여기까지의 결론 역시 막연한 추정일 뿐이고, 일개 범부의 착각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오로지 충성과 애국만 외치며 젊음을 국가에 바친 장교들이 오늘의 혼란과 혼돈에 흔들려, 어쩌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을 지 모른 다는 것이다.

그 분노는 무능했던 전 정권에 대한 것일 수도, 오늘의 이 정권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2018년 7월 25일



<추가 자료>

8월 3일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위의 추정와 유사한 내용의 컬럼을 게재했다.




필자가 취재한 바로는 '기무사 계엄 문건'이 만들어진 상황은 이렇다.

지난해 2월 중순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장관실에 들어섰다. 특별하게 보고할 안건이나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민구 장관이 대화 상대로 불렀다고 한다. 화제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으로 옮아갔다. "헌재의 탄핵 결정이 3월 10일 전후 나올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받고 있다…" 대통령의 향후 운명은 군(軍)에서도 최고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장관과 기무사령관은 어떤 정보에 근거했는지 모르나 대통령 탄핵은 '기각' 결정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결정에 대한 불복(不服)이 폭동으로 번질지 모를 상황을 걱정했다. 이미 야권 대선 주자인 문재인씨가 "기각 판결을 내리면 다음은 혁명밖에는 없다"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둘 사이에 대화가 이어졌다. "기각 결정이 나면 촛불 시위가 격화되고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텐데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을까?" "우리 쪽에서 한번 대비책을 만들어볼까요?" "뭐, 그렇게 해보게."

보름쯤 지나 기무사령관이 장관에게 8쪽짜리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 방안'을 들고 갔다. 장관은 앞부분을 훑어본 뒤 '보관해두게'라며 되돌려줬다. 장관에게는 이것이 기무사 문건과 관련된 상황의 전부였다. 그는 67쪽의 '대비 계획 세부 자료'는 보지도 못했다. 그걸 봤으면 기무사가 바뀐 시대 현실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책상머리에서 이렇게 한심한 문건을 만들었나 하고 알게 됐을 것이다.

어쨌든 탄핵 심판은 '인용' 결정이 났다. 촛불 군중이 정부를 뒤집을 '혁명'의 이유가 사라졌다. 세상은 잠깐 소란했을 뿐 폭동 사태는 없었다. 국가 혼란 상황에 대비한 기무사 문건은 소용이 없었다. 기무사령관은 전역하면서 "나중에 소요 사태가 발생하면 이 문건을 참고할 수 있으니 보관해두라"고 했다고 한다. 그 문건에 불법적이고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파기했거나 들고 나왔을 것이다.

지금 와서 이런 문건이 '내란 음모'나 '쿠데타 미수'의 엄청난 증거물처럼 됐다. 이런 경우를 기자의 언어로는 '과포됐다'고 말한다. 별거 아닌 걸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식으로 과대 포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에 특별수사단을 구성하고 청와대로 모든 문건을 제출하라고 지시해야 할 정도로 긴급한 현안이었을까. 그 뒤 청와대에 전군 지휘관을 모아놓고 "계엄 문건은 불법적 일탈 행위이고 문건 검토 그 자체만으로도 있을 수 없는 행위"라고 한마디로 심판한 대통령에게서 '제왕(帝王)'의 모습을 봤다.

권력을 쥔 쪽에서는 원하는 정치적 의도로 사건을 몰아가고 키우는 법이다. 진짜 문제는 이런 정권의 의도에 사건 당사자들이 일조하는 데 있다. 한민구 전 장관과 조현천 전 사령관은 자신들이 관련된 행위가 '쿠데타 미수'로 몰리고 군(軍) 전체가 매도되는데도 침묵해왔다. 주위에 자신의 억울함만 털어놓았을 뿐이다.

미국에 체류 중인 조현천 전 사령관은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평생 군인으로 자존심을 갖고 살았고 쿠데타라는 걸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나를 내란 수괴죄로 몰고 가느냐"며 울분을 토로했다. 금방이라도 국내로 뛰어와 기자회견을 할 기세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한민구 전 장관도 사석에서는 "너무 황당해 말이 안 나온다. 기무사 문건 문제만 아니라 현 정권의 안보 정책에 할 말이 많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했다. 검찰에 불려가 조사받게 될 자신의 앞날을 떠올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보름 전부터 법률적 준비를 해야겠다며 외부와 연락도 끊었다.

한때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고 더욱이 명예를 중시하는 무인(武人)이라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입장 표명이 검찰을 자극해 자신에게 불리해질지 모른다고 계산한다. 대통령이 이미 '수사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는데도 자신만은 법을 다퉈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는 요행을 바란다. 현 정권에서 이미 많이 봐왔듯이 결국 이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힐 기회마저 잃고 예정된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고 했다. 특히 고위직의 보수 인사들에게는 진퇴와 자기희생, 숙명의 미학이 없다. 이들은 자기 한 몸의 억울함만 늘어놓아선 안 된다. 개인적으로 손해를 더 보더라도 이들에게는 정권의 의도에 맞서야 할 책임이 있다. 현 정권이 이렇게 질주하게 된 것은 책임 있는 개인들이 발언 해야 할 때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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