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한글의 추억, 사라져야 할때 사라져야 하는 건 정치인 뿐이 아니다.
사실 나는 아래한글 매니아였다. (지금은 아래한글로 통칭되지만, 한컴은 아래아 한글로 불러달라고 했음)
아래한글 테스트 버전을 88년(? 89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아래한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애플 8비트 사용자부터 보석글 사용자까지 당시 컴퓨터 좀 한다는 이들은 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이 지원되는 워드프로세스를 쓰는 게 꿈이었다.
아래한글은 소프트웨어로 구현되는 한글 폰트와 풀 다운 메뉴, WYSIWYG이 구현되는 토종 프로그램이었으니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MS-DOS 환경에서 360 KB 디스켓 한장 분량으로 이루어졌고(테스트 버전은 그랬다), 심지어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흔하지 않은) 대우 138 컬럼 도트 프린터도 지원해주었다.
또, 당시 외국 워드프로세서가 구현하지 못하는 독특한 기능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200 자 원고지 형식의 입력-출력도 지원했다. 당시만해도 논문은 모두 원고지로 제출해야 했는데, 아래한글로 문서를 작성한 후 원고지 방식으로 출력할 수 있어 얼마나 편했는지 모르겠다.
첫 논문을 89년에 썼으니 아마 어쩌면 200자 원고지에 프린터로 출력해 논문을 제출한 최초의 의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윈도우즈가 널리 보급되고 차츰 MS-Office 보급이 늘어나면서, 오피스의 MS Word는 사실상 문서 표준이 되었고, 아래한글은 자연스레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아래한글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 프로그램이 워드 프로세서로서 탁월한 성능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실 행정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행정표준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퇴출되었거나 일부 매니아 층이나 쓰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문서 작성, 책이나 논문 저술용 프로그램의 개발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철수가 만든 백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의사 안철수가 처음 알려진 건, 80년대 기계어에 능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어는 2진법을 쓰기 때문에, 매우 난해하지만, 컴퓨터가 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파일 사이즈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하드 디스크가 보급되지 않고 360 KB 플로피 디스크를 써야 하던 시기에는 매우 효율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의대에 다니면서 기계어에 심취되어 관련 글을 당시 유행했던 마이크로소프트 지에 수 차례 기고한 바 있고, 기계어를 다를 수 있었기에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
초창기 컴퓨터 사용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바이러스는 88년에 국내에 출현한 (c) brain 바이러스인데, 크게 치명적인 건 아니었지만, 거의 모든 사용자들이 처음 접하는 컴퓨터 바이러스였으므로 파장이 컸다.
이를 치료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안철수 선생이 만든 vaccine이고, 90년대 이후 디스크의 FAT(File allocation table)를 파괴하여 치명적이었던 LBC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드디어 컴퓨터 바이러스의 심각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를 치료하기 만든 것이 V2였고, 이때부터 안철수라는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철수 선생이 군의관을 마치고 난 후 남부터미널 부근에 만든 것이 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 (현재의 안랩)인데, 초기에 자금을 한컴에서 일부 부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안철수의 역할도 사실 초창기 V3까지가 아니었나 싶다. 이후 V3의 성능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안랩의 제품도 거의 국가 표준이 되다시피하고, 거의 모든 대기업이 의무적으로 안랩 제품을 깔아주다시피했기에 안랩이 지금도 건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찬진이나 안철수가 국내 PC 시장과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공헌한 바 있으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제품들이 전혀 공정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미친 악영향 또한 작지 않아 보인다.
뭐, 물론 그건 이들 뿐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윈도우즈 역시 마찬가지긴 하다. 윈도우즈가 OS로써 탁월하기 때문에 사용한다기보다는 배제하기엔 지나치게 일반화되었고, 탁히 대안이 없기 때문에 사용한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참고로 나는 2011년부터 맥을 쓴다. 개인적으론 너무 늦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적절한 시점에 갈아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 빨리 맥으로 옮겨가지 않았을까 후회하기보다는 macOS를 쓰니 세상 편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당연히 안랩 제품과는 일찌감치 결별했는데, 다만, 어쩔수 없이 아래한글은 쓰고 있다.
여전히 정부에서 나오는 각종 문서는 hwp로 작성되어 있어 이를 보기 위한 뷰어를 설치해 두고 있다.
이게 아주 지랄맞다.
또, 은행 관공서 등의 사이트를 이용할 때 어쩔 수 없이 각종 보안, 인증 프로그램을 설치할 때마다 욕이 튀어 나온다. 이때 가끔씩 유령처럼 슬며시 나타나는 안랩 제품을 보고 쓴 웃음을 짓곤 한다.
사라져야할 때 사라져야 하는 건 꼭 정치인만은 아니다.
2018년 7월 26일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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