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그 이후 조선의 독립군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적 배경은 한일합병 이전이다. 즉,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건 등이 있었던 1907년 말 경까지이다.

드라마에서 고신애와 동행하던 유진 초이는 고신애를 지키려다 죽고, 고신애는 만주로 보이는 곳에서 독립군을 훈련하는 모습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실제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많은 이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다.

이들이 속속 집결한 곳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지역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조직하였고, 이 군대가 독립군이다.

독립군은 어느 한 부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국경 이북에는 지역별로 각자 조직한 여러 개의 독립 부대들이 각자 활동했다. 한 부대의 수가 천명이 넘는 곳도 있었다.

1920년 전후, 두만강 이북 접경 지대에서 독립군 활약은 컸다. 이들은 간도는 물론 국내로 진입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자료에 의하면 1920년 독립군은 천6백회 이상 출병하여 70회가 넘는 교전을 벌었다. 그러나 21년에는 600 회 출병으로 줄고, 28년에는 4회 출병으로 사실상 아무런 교전도 하지 못했다.(김용삼 현대사 시시비비)

독립군의 활동이 급작스럽게 줄어들게 된 첫번째 이유는 러시아 때문이다.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 등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군 4천여명을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 시)로 유인해 몰살하거나 포로로 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거나 실종된 수는 3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미리 도망간 김좌진 등 일부만 살아남았다.

두번째는 독립군 연합부대 간의 반목과 상쟁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없었고,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뒤섞여 서로 반목하고 급기야는 서로 총질을 하며 싸웠다.

세번째는 일본의 전략 때문이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독립군들이 만주를 기반으로 세를 키워 국경을 넘나들며 게릴라 전을 벌이는 것을 방관하면 더 큰 사태가 생길 것으로 보고,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대를 구성해 중국으로 보내는 동시에 만주 군벌을 회유해 독립유공자를 체포해 넘기면 포상금을 주는 협약을 맺었다.

이 같은 전략은 유효했고, 결국 만주에서 독립군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만주 일대에 독립군이 재기한 건 만주사변(1931년) 이후 몇 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하얼빈 인근에서는 지청천 장군이, 압록강 이북에서는 양세봉 장군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중국 항일군과 연합해 일본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김용삼 현대사 시시비비)

그러나, 그 활동도 몇년에 불과했고, 양세봉 장군이 살해된 후 다시 만주에서 독립군의 이렇다할 활동은 없었다.

오히려, 만주 일대에 체류했던 조선인들은 중공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항일 유격대에 용병으로 참여했다.

이 중공군 항일 유격대 간부는 중국인이었고, 전투원의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

훗날, 중국 정부는 1928년부터 일본 패망 때까지 간도 일대에서 항일 투쟁한 유격대원들을 열사로 인정했는데, 이들의 수는 3,125명이었고, 이중 조선인은 3천명이 넘었다. (김용삼 현대사 시시비비)

그러나 이 유격대의 항일 투쟁 목표는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중국 인민 해방과 만주 회복, 중화조국 옹호였다.

중국인을 간부로 모시고 항일 투쟁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임정은 1940년 경 광복군을 창설한 바 있다.

광복군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수는 750만명이었다.

다른 기록에 보면, 해방 당시 광복군 수가 가장 많았을 때 장교와 병사의 수는 700명 가량이라고 한다. 그나마 지휘관, 참모장 등 주요 장교는 모두 중국군이었다.

그러나, 이 수는 부풀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면, 임정은 광복군을 운영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급여, 무기, 장비를 모두 중국 정부로부터 빌려야했기 때문이다. 즉,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수를 부풀렸다는 얘기이다.

중국 정부는 돈을 빌려주는 댓가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명목상으로만 임정이 통수권을 가지는 것으로 했다. 그나마 빌린 돈은 독립하면 갚아줘야 했다.

김구는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자 급한 마음에 독자적으로 한반도 진군을 추진한 적 있는데, 중화민국 국민당이 반대로 포기했다. 광복군을 움직일 힘이 김구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광복군은 해방이 된 후에도 한반도에 들어오지 못했고, 임정이 파견한 몇 명이 명목상 국내지구사령부를 설치했을 뿐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를 모두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려, 광복군 지구대는 곧 해체되었고, 상해에 남아있던 광복군 본진도 1년 후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 사라졌다. 이후 이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는데, 귀국 당시 국민들에게는 광복군의 수는 20만명이라고 거짓 홍보했다고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항일 독립 운동을 하거나, 독립군으로 무장 투쟁을 한 이들을 비하하거나 그들의 희생을 가볍게 생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결과에 관계없이 숭고하며, 그렇게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이나 만주나 제대로 된 인구 조사는 일본과 관련이 있다. 조선은 한일병합 후인 1910년 이후, 만주는 만주국 설립 후인 1932년부터 인구 동태가 파악되는데, 1932년 만주국 체류 조선인의 수는 대략 63만명 가량이었고, 35년에는 85만명으로 부쩍 늘고, 39년에는 1백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만주에 거주했다.

조선의 인구는 합병 당시인 1910년 16백만명 (추정. 호구조사 인구는 13백만명), 1929년 2천만명(추정치. 호구조사 인구는 18백8십만명)이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 인구의 자연성장율은 1910년-1915년 사이 10.57% , 1935-1940년에는 20.4, 1940-1944년에는 24.4%로 증가하였다. (한국인구학. 2009년. 박경숙. 서울대사회학 교수)

일제 시대가 갈취, 고문의 고통과 암흑의 시대였다면 이렇게 급격히 인구가 늘었을까?

아무튼, 당시 조선에는 2천만명이, 만주에는 1백만명의 조선인이 살았다. 그런데, 독립군은 1만명이 되지 않았고, 광복군은 고작 5백여명이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18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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