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없이 추락하는 의권(醫權)












2000년 의약 분업 당시 의료계의 구호 중 하나는 "의권(醫權) 수호"이었습니다.

의권이란 의사의 권리를 말하며, 의사의 권리란 바로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 즉, 진료권을 말합니다.

의료법에 "진료"의 정의를 명확하게 내린 바는 없으나 사회 통념상 진료는 "진단과 치료"의 제반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의료법에는 의사의 업무는 "의료와 보건지도"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법 2조 2항), 의료법상 의료 행위의 정의는 "의료인이 하는 의료 기술의 시행"을 말하는데, 의료 행위의 시행은 법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으며 (법 제 12조),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료인도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법 제 27조)고 규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의료법에 '진료'라는 용어가 100 회 이상 사용되고 있고, 그 주체가 의사라는 것은 직간접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진료나 진료권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 것은, 굳이 이를 법으로 정의할 필요가 없을만큼 사회적 통념이 명확하고, 또 한편으로는 법으로 정하기에는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환자에게 시행되는 침습적 검사나 행위, 이를테면 배뇨관 삽입, 정맥 주사의 투여, 동맥혈의 채혈 등 뿐 아니라, 심지어는 심전도 검사 역시 의사가 해야 하는 행위로 구분하여 의사가 직접 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이전에는 방사선 촬영도 의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료 행위가 복잡해지고, 병원이 대형화하면서 의사가 해야 하는 고유 행위가 점차 다른 직역으로 이행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안경사 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과 의사들은 안경사가 자동굴절검사 기기를 사용하여 시력 검사를 하고, 콘택트 렌즈를 판매하는 것이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한다고 보고, 이를 허용한 의료기사법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한 바 있습니다. (1993년) 당시 헌재의 기각 결정문을 볼 때, 안과 의사회가 이를 공론화한 것에는 동의하나, 그 대처에는 매우 미흡했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입니다.

게다가 이 판례는 의료기사들의 독립개설권 주장의 촉발제로 작용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언급했다시피, 의사의 진료권은 그 경계가 모호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른 직역으로부터 권리를 가져가려는 시도에 직면하고 있어, 늘 방어적으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반복적으로 주장되어 온 것 중의 하나는 물리치료사의 단독 개설인데, 이들의 논리는 물리 치료는 전적으로 물리치료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고, 의사는 처방을 할 뿐인데, 막상 의사는 물리치료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료기사법 제 1 조에 규정된 의료 기사의 정의 즉, "의사·치과의사의 지도하에 진료 또는 의화학적 검사에 종사하는 자"에서, 지도라는 단어를 빼고 '처방' 등으로 바꾸어 달라는 것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물리치료사는 단독 개설이 가능해지며, 환자는 의사의 처방전을 들고 개설된 물리치료원(?)에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 외에 '문신'도 현행법으로는 의료 영역이며, 의사 만이 시술할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신만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업소에서부터, 미장원에서 이루어지는 문신까지 사실상 폭넓게 불법 의료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의협도 정부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비의료인의 행위가 아니라 의료인들의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한의사들의 의료기기 사용이나 약침이란 미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정맥 주사, 치과의사들의 보톡스 시술 들이 그 예인데, 2016년 대법원은 치과의사의 보톡스 시술은 면허 범위를 벗어난 의료 행위라는 1,2 심의 판결을 파기 환송한 바 있습니다. 또 약침은 그 위험성, 유효성 논란에도 불과하고 '합법적'으로 널리 시행되고 있으며, 한의사들의 의료기기 사용 주장은 국회의 단골 입법 발의 사항이기도 합니다.

최근, 한의사협회의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불법적인 입법 로비가 제기된 바 있는데, 의료기사 단체 (물리치료기사 협회, 안경사협회 등) 들의 입법 로비 역시 수 차례 적발된 바 있습니다. 즉, 이들은 불법적인 로비를 통해서라도 의사의 진료권을 가져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 뿐 아니라 간호사 협회나 약사회 역시 의사의 진료권을 넘보는 사례는 많습니다.

간호사 협회는 '간호 진단'이라는 명분으로, 약사회는 "약료"라는 미명으로 진료권을 침해합니다. 약료란 약으로 치료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간호 진단은 간호대의, 약료는 약대의 정규 교과 과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약료경영학회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된데에는 여러가지 배경과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의사나 병원이 이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의권을 지키내기는 커녕, 편의성, 경제성 등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방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PA 문제입니다.

여러가지 환경의 변화 즉, 전공의들의 근무 개선, 인력 부족 등의 이유를 들어 PA를 사실상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수 많은 대학병원, 종합병원 등이 있는 가운데, 의권 수호는 색바랜 구호가 되었을 뿐입니다.

PA 뿐 아니라, 최근에 응급센터에 KTAS(Korean Triage and Acuity Scale) 즉,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라는 제도도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는데, 이는 응급실을 방문하는 환자를 의사가 진료하기 전에 먼저 환자 중증도 평가를 통해 분류를 하는 것입니다. 즉, Triage를 하는 건데, 새삼스럽게 이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이미 시행되고 있는 환자 분류하는 행위를 통해 수가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KTAS는 별도의 인원이 있어야 하므로, 인력과 환자분류소라는 공간 확보가 가능한 규모 있는 병원에서 가능한 제도이며, 중소 병원은 엄두 내기 어려운 제도이어서 사실상 대형 병원에 수가를 더 주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KTAS는 사실상 단순히 환자를 분류하기 보다는 환자로부터 각종 정보를 얻어 진단을 내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디가 아프냐" 로 시작되는 문진의 과정인 것입니다.

KTAS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는 이 문진의 과정이 사실상 간호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KTAS는 대한응급의학회가 시행하는 소정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만 실시할 수 있으며, 2017년 이전 교육자 4,703명 중 간호사는 3,576 명이며, 의사는 716 명에 그칩니다. 올해부터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올해 교육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이며, 역시 간호사들이 절대적으로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KTAS를 할 때 매우 상세하게 문진을 하게 되는데, 의사가 진료를 하면 거의 유사한 질문을 하게 되므로, 환자들은 반복적으로 대답해야 하여 짜증을 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간호사에 의해 이루어진 문진을 토대로 진단을 내리는 일도 비일비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간협의 입장에서는 이제까지 교육해 온 간호 진단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의료계로써는 진료권의 누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이 과정이 응급의학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일부 의사들이 이 일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응급의료체계의 발전을 위해서?

환자 분류를 하지 않으면 진료가 어려워서?

KTAS를 응급실 매출 증대의 수단으로 사용해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뭔가 의료계에 자신이 기여한 업적을 남기려고?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제도는 의사 진료권 붕괴의 단초가 될 것이라는 것이며, 매우 나쁜 사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Triage는 의사의 고유 업무이었으며, 지금도 그래야 옳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 일부 국가나 병원에서 Triage 전문 간호사에 의해 환자 중등도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대부분 그 국가의 의료체계가 간호사의 역할이 의사에 수준에 이른 곳, 즉,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전문 간호사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고, 사회 문화적으로 간호사가 의사에 버금가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가 대표적인 곳입니다. 캐나다는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간호사의 업무 영역이 발달되어 있어, 환자의 입원 관리 (입원전 면담, 검사 등), 만성질환 전문 관리 등을 모두 간호사들이 맡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곳은 의사의 권리를 간호사가 의도적으로 침해하려고 하거나, 이를 막기 위해 의사들이 전력 방어하는 곳이 아닙니다.

때문에 만일 여건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KTAS를 도입하고, 이를 간호사에게 일임하겠다고 하면, 사전에 응급환자 문진을 간호사에게 맡긴다는 의료계 내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공론화없이 일방적으로 진료권의 문을 열어 주는 행위는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의료계의 위상 약화는 결국 내부적 문제로 생깁니다.

간호사가 진단하고, 약사가 치료하는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 때 PA니 KTAS니 하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당신들은 은퇴하거나 싼 값에 많은 의사를 고용한 고용주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폐해는 결국, 당신들의 후배와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2017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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