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결함과 사회 보장이 보편적 복지보다 중요한 이유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결정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근로 소득이 자본 소득을 뛰어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근로 소득이 전부인 경우와 이미 자본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비교할 때, 근로를 통해 벌어들이는 급여 소득이 자본이 벌어들이는 소득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급여를 쪼개 아무리 저금을 해 봐야, 강남 아파트 값이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 결과 소득 격차가 생기고,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생하며, 소수가 부를 점유하게 된다.
토론토 대학의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이같은 현상이 자본주의의 문제라기 보다는 모든 자연 현상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파레토 원리(Pareto principle)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파레토 원리는 "이태리 인구의 20%가 이태리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이태리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전체 결과의 80%가 20%의 원인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그래프로 표현한 것을 The long tail phenomenon (긴꼬리 현상)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원인이 자연 법칙이든 아니면 자본주의 결함이든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결과 절대적 빈곤계층이 발생하고, 낮은 근로 소득에만 의존해야 하는 계층도 존재한다는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이들은 현실적 어려움과 상대적 빈곤에 의한 자괴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이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절대적 빈곤 계층에 대한 돌봄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숙명과 같은 것이다. 이 경제 체제 덕에 좀 더 나은 삶을 누리는 이들이 이 경제 체제가 만들어내는 오류의 결과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다수가 이에 동의하였고, 그 결과가 헌법 제 34조이다.
이 헌법 조문에 따라 사회보장 기본법 등이 제정되었다.
즉, 절대적 빈곤, 질병, 장애, 노령, 실업 등 사회적 위험에 처한 국민들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가로부터 사회보장(Social security)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이들에게 사회적 위험에서 벗어나게 할 책무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보장이란 이를 누릴 권리가 있는 자들에게 그 권리를 보장 하는 것이다.
이를 "선별적 복지"라고도 한다.
그런데 진보 진영, 이른바 좌파들은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다.
사실 복지(Welfare)는 대단히 모호한 개념이다. 우리 법에 아동복지법, 노인복지법, 장애인복지법 등이 있지만, 복지의 법적 정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사회보장'은 사회보장 기본법 제 3조에 명확하게 그 정의가 설명되어 있다.
[법 제 3조 1항 "사회보장"이란 질병, 장애, 노령, 실업, 사망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모든 국민을 보호하고 빈곤을 해소하며 국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제공되는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복지서비스 및 관련복지제도를 말한다.]
우리와 정치인들은 모호한 개념의 복지보다 사회보장을 더 입에 자주 올려야 한다.
물론, 보편적 복지를 무작정 비난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보편적 복지의 대표적인 것이 '기본소득제' 같은 제도인데, 개인적으론 언젠가 기본소득제가 필연적으로 도입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도입하는 것은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이 제도의 필요성에 견주어 볼 때 여전히 기본소득제의 실익에 의문이 있고, 기본소득제의 사회적 효력이 검증된 바 없으며 굳이 우리나라가 기본소득제라는 거대하고 위험한 실험을 자청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OECD는 기본소득제 실시의 가이드라인을 정한 후 몇 개국에서 이 조건에 따라 시뮬레이션을 한 바 있다.
가이드라인은 1) 모든 국민에게 국가별 최저 생계비 수준의 기본 소득을 제공하고 2) 기본 소득에도 과세하며, 3) 기본 소득 외의 기존 복지 혜택과 세금 공제를 삭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뮬레이션의 결과, 기본 소득 지급액은 오히려 빈곤선을 밑돌았다. 예컨대 프랑스 성인은 기본소득으로 월 456유로(약 57만원)를 받게 되는데, 프랑스 성인 1인당 빈곤선은 이보다 훨씬 높은 월 909유로(약 114만원)였던 것이다.
즉, 몇몇 국가에서는 기본소득제의 실시가 오히려 빈곤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마디로 기본소득제는 현재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제한된 재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가장 시급한 곳에 우선 투입하는 것이다. 즉, 선별적 복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저소득층이 늘어나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 뿐이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 특히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발달한 국가일수록 도드라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럽과 북미 등 많은 서구 국가들이 이를 극복해 보려고 유행처럼 시도하는 것이 바로, 최저임금제 인상이다.
미국의 경우, 2009년 연방 정부가 시간당 7.25 달러로 정했던 (사실은 권고했던) 최저임금을 2017년 초부터 19개 주에서 9.25 ~ 11 달러로 올렸다. 캘리포니아는 2022년까지 15 달러로 올릴 예정이다. 미국의 시민단체들은 2012년 이후 ‘15달러를 위한 싸움(Fight for $15)’ 캠페인을 해왔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경우, 2017년 10월 11.4 달러에서 11.6 달러로 인상한 후, 2018년부터 14 달러, 2019년 15 달러로 대폭 인상한다. 다른 주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인상하게 된다.
국내외의 최저임금 인상 반대론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많은 수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사실일까?
독일의 경우, 최저임금제도라는 게 아예 없다가 2015년 1월부터 시간당 8.5 유로 (약 1만1천원)의 최저임금제를 시행했는데, 실업률은 최근 20년 내 최저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신규 일자리가 40만 개 더 생겼다고 보고했다. 예측과 정반대의 결과였다.
또, 독일 정부는 2015년 1년 동안 식당, 소매점 (편의점)의 비정규직 중 6만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였으며 고용 안정성도 높아졌다고 밝혔다. 독일의 경우 노동 인구 4350만명 중 400만명이 최저 임금을 받고 있다.
영국의 경우 1999년 최저임금제를 도입했다가 2016년 4월부터 최저임금보다 8~9% 높은 ‘생활임금’제(Living wage)를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생활임금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 유지가 가능한 생활비용으로 영국 평균은 시간당 최저 7.85파운드(1만1400원. 2014년)다. 런던의 생활임금은 그 보다 높아, 9.15파운드(1만3300원. 2014년)이다.
영국의 생활임금제는 고용 안정성을 높이고, 소득 증대 효과를 본 대표적 사례로 손꼽고 있다. 서울시는 이를 차용해 '서울시 생활임금제'를 도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 모두 효과적인 건 아니다. 유럽의 최저임금 인상이 긍정적인데 반해 미국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시애틀은 2017년 시간급 15달러를 최초로 시행한 곳인데, 워싱턴 주립대는 연구를 통해, 시애틀의 최저임금 인상으로 임금은 3.1% 올랐지만, 전체 근로시간은 9.4% 줄었고, 그 결과 저임금 근로자의 월 평균 소득도 125달러 감소했으며, 일자리도 7% 줄었다고 발표했다.
미주리 주 의회는 시 의회의 최저임금 10 달러 인상 안에 반박해 오히려 7.7 달러로 깎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주리 주지사는 최저임금이 높으면 일자리를 죽인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사례로 볼 때, 최저임금 인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왜냐면 그 결과는 계산하여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적 실험의 결과로 나타나며, 게다가 국민 의식 수준, 그 나라의 문화 수준과 크게 관계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우리나라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가치를 더 높게 쳐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따라서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에 비판적인 이유는 그 결과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대비없이 서구 국가를 따라하기에 급급해 보이며, 포괄적이고 종합적 대책없이 제도를 강행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최저 임금 인상에도 불구하고 실질 소득은 오히려 줄어들고, 고용은 감소하고,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더 큰 부담을 져야 하며, 물가는 오르게 되었다.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중요한 정책을 정치적, 이념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소득 양극화 극복은 손에 돈을 몇 푼 더 쥐어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폐해가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문제는 이렇게 허상 속을 헤매는 동안에 선별적 복지, 사회 보장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은 오히려 더 소외되고 어려워져 간다는 것이다.
2018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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