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기본조약
요미우리 신문 기사를 요약하면, 지난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징용노동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25일 아베와의 전화 통화에서는 말을 바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된 것이며, 개인에 대해서는 정부가 보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에 대해, 청와대는 입을 다물고 있으며, 청와대 관계자 중 일부는 오보라며 발뺌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언론들의 이 같은 보도는 mbc 만이 보도하고 있다.
대통령의 17일 발언대로 개인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25일 통화 발언대로 이미 청구권은 소멸된 것이 맞는지 생각해 보자.
태평양 전쟁 이후인 1951년, 패전국인 일본의 처리를 놓고 승전국인 미국은 관련국들을 불러 모아, 전쟁 보상과 전후 일본 처리에 대한 결정을 한다. 이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라고 부른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서방 세계로 끌어들여 냉전 시대의 소련을 견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후 일본 처리는 미국의 주도적이고, 일방적인 통고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즉, 해외에 있는 일본의 자산 (1945년 기준 약 253억 달러에 이르는)을 각 점령국이 몰수(청구권 포기)하는 것으로 하고, 그 대신 일본의 영토와 영해를 인정하고, 일본국과 국민의 주권을 회복시키고, 더 이상 일본에 대해 피해 보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못 박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샌프란시스코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강화조약에 사인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대일 청구권은 살아있다고 주장해 온 것이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일본의 패전 당시, 조선은 태평양 전쟁에 의해 점령된 피점령국이 아니라, 이미 그 훨씬 전에 스스로 나라를 일본에 가져다 바쳐 (혹은, 강제로 빼앗아) 합병된 상태였다. 즉, 일본과 합병된 상태로 사실상 일본의 동맹국 혹은 속지에 해당하며, 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당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것이며, 강제 징용에 의해 수동적으로 전쟁터에 끌려나갔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우리의 주장일 뿐 당시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조선이 피해자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수 있다.
이 같은 시각에 동의하지 않은 학자들이나 국민들도 많을 것이다.
아무튼, 이 조약이 체결된 51년 9월 당시 이승만 정부는 625 사변에 몰두되어 있었고, 전쟁이 급선무이지, 대일 청구권 문제는 나중 일이었다. 또, 이승만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가 그렇게 좋은 때도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은 우리나라에는 충격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한편, 피점령국의 일본 재산은 피점령국에게 귀속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인용하여, 한국 내 일본국 혹은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정부가 임의로 처분하기도 했다.
이후 한일간 회담을 통해 식민지 지배 통치에 대한 보상 문제를 거듭 논의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개인 배상을 희망했으나 우리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박정희 혁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을 보내 한일기본조약을 맺도록 한다.
또 이와 함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역시 체결한다.
이 협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투자한 자본과 재산, 일본인의 재산(약 47억 달러 규모)을 모두 포기하고, 3억 달러 무상 자금 지원, 2억 달러 차관을 지원키로 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협정 제 2조는 다음과 같다.
제2조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 내용으로 보자면, 이 협정을 맺음으로, 대일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놓고 보면,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개인 배상의 의무가 없으며, 한일기본 조약과 재산 및 청구권 협정에 따라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이 명백한 국가간 조약, 협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뀔때마다, 혹은 때에 따라, 걸핏하면 일본에 보상을 요구하고 반일 감정을 쌓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60년 초반 박정희 대통령이 지나치게 서둘러, 너무나 약소한 금액으로 청구권을 비가역적으로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로는 적은 금액도 아니었고, 크던 작던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금이었고, 나아가 경제 성장을 위해 일본의 도움이 절실했던 때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이 같은 일련의 과정으로 볼 때, 징용자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대통령의 주장은 명백하게 틀린 것이다.
적통을 이어받는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선대 대통령이 맺은 국가간 조약을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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