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행은 북폭을 통보받을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정말 전쟁이 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이미 지금처럼 전쟁 발발 공포에 이미 한 차례 휩싸인 적이 있다. 바로 1994년 6월 북한이 IAEA 탈퇴를 선언한 직후이다. 이를 1차 북핵 위기라고 하는데, 사실 1차 북핵 위기는 93년 북한의 NPT 탈퇴에서 시작되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6월 13일 북한이 IAEA 탈퇴를 선언하고 사찰단을 추방시키자,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 들였다.
그로부터 약 3일 동안 한반도에는 최고 수준의 긴장이 감돌았다.
미국은 한반도 주변에 무력 전개를 시작했고, 주한 미국 시민의 소개 작전(NEO)을 검토했다. 당시 한미연합군에는 작계 5027이 있을 뿐, 작계 5026은 없었다. 작계 5027은 북한이 남침했을 때를 가정한 전면적 작전 계획이고, 작계 5026은 1차 북핵 위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작계 5026은 선제적, 선별적 정밀 공중 타격을 의미한다. 이른바 Surgical strike라고 불리는 것이다.
대신 클린턴 행정부가 고려한 것은 일명 “오시라크(Osirak) 옵션”이었다. 오시라크는 프랑스가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에 건설하던 원자로 이름인데, 1981년 이스라엘은 바빌론 작전(Operation Babylon)을 전개하여 건설 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파괴하였다. 이를 위해 8대의 F-16A와 6대의 F-15A를 동원했고, 16 발의 마크 84 폭탄을 투하하였다.
이스라엘 전폭기의 출격 항로 |
이 공습은 전쟁사에서 흔히 언급되는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의 대표적 예이다.
오시라크 옵션을 검토했다는 것은, 전면전 대신 영변 핵시설 등의 제한적 선별 타격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 경우 북한이 반격에 나설 것이며 휴전선 인근에 무고한 피해가 상당수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선뜻 군사 작전에 돌입하지 못한 이유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오시라크 옵션을 시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퇴임 후 발표한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에 3주 앞서 (즉, 5월 경) 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양측이 입을 막대한 피해 규모에 관해 정신이 번쩍 드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 보고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소 수십만명에서 최대 백만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보고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페리 국방장관은 그 같은 막심한 피해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 때, 주한 미 대사로부터 특사를 보내 김일성의 의견을 타진하겠다는 보고를 듣는다. 이에 대한 회고도 있다.
“1994년 3월 하순 북한의 심각한 핵위기가 시작됐다. 나는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중략) 그런데, 6월 1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 방문 용의를 밝혔다. 나는 앨 고어 부통령 및 국가안보팀과 협의 후 시도해 볼 만하다고 결정했다.”
백악관 내에서 지미 카터의 방북에 대한 열띤 논의가 있었고, 고어 부통령은 카터의 방북에 동의했고,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앤서니 레이크 안보보좌관 등은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미 카터의 방북은 당시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가 주선했다.
제임스 레이니 대사와 김영삼 대통령 |
그의 당시 회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북미간 대화 채널이 없었는데, 미국이 이 같은 대화 채널을 만들지 않은 것은 북한과 공식적으로 직접 접촉을 하면 미국이 양보를 하기 위해 첫 걸음을 떼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한국에 증강 배치될 경우 북한은 이를 미국이 1990년 이라크 침공과 비슷한 침공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 수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미국이 이라크 침공 때처럼 군사력을 증강해서 북한을 궤멸시키도록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대화 채널이 없으므로 북한이 사안의 중대성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북측과 논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즉, 북한의 의중을 파악하고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제임스 레이니 대사가 특사로 생각한 인사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상원 군사위원장인 샘 넌 민주당 의원과 상원 외교위원회 공화당 간사였던 리처드 루거 의원을 북에 보내기 위해 접촉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이미 2년 전 김일성으로부터 방북 초청을 받은 바 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부탁했고, 그 결과 지미 카터의 방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다. 후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지미 카터의 방북에 대해 보고하자 불쾌해 했다. 이유는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미국에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주요 방송국에 북핵 위기에 대한 방송을 하라고 명령했고, 위기감을 느낀 시민들은 사재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미 카터가 김일성으로부터 IAEA 사찰을 다시 받고 핵 시설을 동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왔고, 무엇보다도 김일성과 김영상 대통령의 정상 회담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와 김영삼 대통령을 기쁘게 했다.
이후 제네바 협정을 맺으며, 1차 북핵 위기는 결국 끝났다.
그러나, 지미 카터의 선물은 공갈빵과 같았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았고, 한미일은 KEDO를 설립해 경수로 원자로를 지어주었지만, 북한은 뒤로 핵물질에 대한 원심분리를 진행하며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결국 2차 핵위기가 발생하며, 제네바 협정은 깨졌다.
더욱이 김영삼 대통령이 바라던, 남북 정상회담은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김영삼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바란 건, 이를 통한 남북한 평화 관계 유지라기보다는 김대중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1차 북핵 위기를 교훈으로 삼자면,
첫째, 국제 위기에 대응하는 미국의 전략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무력 전개로 압박하고, 다른 루트를 통해 상대를 굴복하는 병진 전략을 수 차례 써 왔다. 1차 북핵 위기에도 2대의 항모 전단 등을 동해에 전개하고 북한을 압박했다. 제임스 레이니 대사가 우려한 것은 이 같은 무력 시위를 김일성이 오판하여 북이 선제 공격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굴복한 건, 철저히 미국의 군사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움추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 북핵 위기에서 미국이 과거와 동일한 전략을 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즉,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한편, 뒤로는 대화를 모색할 가능성 말이다. 물론 그 가능성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둘째, 미국의 외교 군사 정책의 대상이 비록 한반도라할지라도,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영삼 정부는 자신과 협의없이 지미 카터를 북한으로 보낸 것, 오시라크 옵션을 검토하면서 협의하지 않은 것, 미국 시민들의 소개 작전을 전개하면서(사실은 계획만 수립된 상태이며, 전개 작전은 없었다) 한국 정부와 협의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해 미국에 불만을 터트렸다.
미국은 오시라크 옵션이나 비전투요원 소개 작전은 검토만 했을 뿐 실행에 옮기지 않았으므로 한국 정부와 협의할 사항이 아니라며 간단히 일축했다.
유사하게, 만일 앞으로 미국이 어떤 군사 작전을 전개하더라도, 이를 사전에 한국 정부와 협의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94년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여러가지 옵션 각각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응을 궁금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반응을 타진하는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설령 북한이 평화적 제스처를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차 북핵위기와 제네바 협정 이후에도 북한은 수 차례 핵사찰과 핵폐기를 거론하며 평화적 제스처를 취한 바 있다. 그러나 매번 협정을 깨지고, 북은 핵무기 개발의 진척을 보여 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년 동안 북한이 미국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 발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심중에는 “그래도 한 민족인데, 전쟁보다는 평화적으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일단 이 고비를 넘겨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한번, 북한 정권의 말을 믿고, 평화적으로 해결해 보자”고 주장하는 이는 색안경을 끼고 봐야 한다. 붉은 렌즈의 색안경 말이다.
자, 결론으로 들어가자.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북폭을 결심하면, 이를 황 교안 대행에게 통보할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점은 항모에서 폭격기가 이륙한 다음이 될 것이다.
그럼, 사전에 협의할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을 비판하거나, 우리 정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우리 정부가 무능하거나, 미국이 한국을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로지 전략적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전에 협의를 하건, 하지 않건 여론은 우리 정부에 대해 비난의 포화를 쏟을 것이 분명하다.
주권국가에서 헌법상 영토인 곳에 미국이 폭격하는 것을 사전에 몰랐다면, 몰라서 문제이며, 한미 공조에 결함이 있다고 말이다. 또, 한편, 사전에 알았다면, 왜 공격을 막지 못했느냐고 비난할 것이 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정부나 황교안 대행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황 대행 입장에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편이 낫다. 정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2017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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