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우리의 나아갈 바에 대하여 / 의협 정총에 즈음하여
2014년은 여러 모로, 의협 사(史)에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의협이 만들어진 이후 최초로 총회에서 회장이 불신임 받는 기록을 남겼고, 한 달 사이에 총회를 세 번이나 개최한 기록도 남기게 되었다.
의료계는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짧게는 최근 2년, 길게는 지난 14년 동안의 의협 사가 그랬다.
지난 99년 유성희 회장이래 3년의 회장 임기를 제대로 채운 회장은 단 2명 뿐이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 두 명의 회장의 임기를 제외한 8년 동안 회장 대행까지 무려 7명의 회장이 자리를 바꾸었다.
협회는 다양한 고유 업무 외에도 대의원총회가 의결한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해야 하는 중장기 업무를 집행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회장이 바뀌면서 임원도 덩달아 바뀌게 되어, 대관 업무의 일관성이 사라지고, 복지부나 국회 등 주요 기관도 의협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번 정기 총회는 지난 2년 여간 노환규 전 회장이 남긴 갈등을 봉합하고 정관 미비 사항을 보완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변영우 의장은 “의협 대통합 혁신위원회” 구성을 제안했고, 총회는 이를 의결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있다. 노 전 회장은 임총 의결에 불복하여 효력 가처분 신청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지금도 여전히 페이스북을 통해 사원총회 개최를 주장하며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또 60일 이내에 잔여 임기 1년을 채울 신임 회장을 선출해야 하며, 1년 후에는 새로운 회장을 다시 선출해야 한다.
투쟁은 종결된 것이 아니며, 지난 임총에서 의결된 비대위도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
노 전 회장이 정부와 체결한 제2차의정협상 결과에 대한 처리도 남아있다.
따라서 4.27총선은 마무리가 아닌 새로운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늘 그렇지만, 우리는 실수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교훈을 얻지 못하는 실수는 상처와 갈등만 남길 뿐이다.
뼈 아픈 교훈
노 전 회장이 강력한 지지를 받고 회장에 선출되었던 이유도 곱씹어봐야 한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다수 의사들이 절벽 끝으로 내몰린 절박한 심정에서 강력한 투쟁을 갈망하였기 때문이며, 이들은 노 전 회장이 그 투쟁을 이끌어 줄 메시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의료계 상황이 더 물러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사실(fact)과 노 전 회장이 의료계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환상(fantasy)가 오묘하게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수렁에 빠진 의료계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 의료계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과 지난(至難)한 협상과 도전을 해야 할 뿐이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누군가 자신을 구해 줄 것 같은 판타지에 빠진 이유는 노 전 회장의 선동가적 기질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선동으로 실재(實在)하는 성과를 낼 수는 없다.
그건 마치 컨설턴트(Consultant)가 사업 컨설트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직접 사업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노 전 회장은 임상가로서의 경험보다 사업가(?)로서의 경험이 더 많고, 의사회 회무 경험이 없어 의료계 문제의 본질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의료 현안에 대한 선동에는 탁월할 수 있어도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미숙할 수 밖에 없었다.
사업을 컨설트(consult)하는 것과 사업을 수행(execution)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컨설턴트는 대부분 그 용역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에게 ‘이 사업은 안 된다’거나 ‘어렵다’고 하지 않으며, 대부분 장밋빛 그림을 그려 주는데 익숙하다. ‘안 된다’고 하는 컨설턴트에게는 누구도 용역을 의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 전 회장의 그 장밋빛 그림에 다 속은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만든 전의총을 통해 문제 제기를 하며 의협을 견제하는 의료계 시민단체의 역할을 하는 편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선택도 우리의 판단이었으므로, 그 결과 역시 승복해야 한다. 그로 인해 소비한 수 년 간의 시간과 쓸모 없이 낭비한 회비, 실추된 의협의 권위와 신뢰, 깊어진 내부 갈등과 반목 등 모두 우리가 감수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이렇게 망실(亡失)한 자원을 통해서 그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미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의협 대 통합 혁신위원회에 거는 기대
이번 정총에서 변영우 의장이 지적했듯 의협은 지난 갈등을 봉합하고, 대폭 늘어난 의사들의 민의를 반영할 수 있도록 정관 전면 재개정의 필요성이 있다.
의협 건물이 낡았듯 정관 역시 필요에 따라 부분 개정을 하여 누더기처럼 낡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회원 수 만 명에 소수 의료계 지도자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의협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훨씬 더 많은 회원과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하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낡고, 좁아진 옷을 입고 있을 수 없는 시점에 이른 것이 사실이다.
정관 개정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고, 또 이미 수 차례 정관 개정안을 만들고 폐기하기를 거듭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정관 개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헌법을 전면 개정하는 것과도 같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의견이 다른 수 많은 직능, 지역 단체들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고 만족할 수 있는 정관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정관 개정의 필요성이 누적되었고, 다수 회원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1년 동안 정관 개정 작업을 통해 내년 정총에 정관 개정안을 통과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의협 대통합 혁신위원회가 이 업무를 진행하다 보면, 대통합은 오히려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정관 개정은 갈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관 개정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있다. 과거의 예를 보면, 정관 개정 때마다 소수의 목소리가 주도하고 나머지 다수는 끌려가는 형국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변영우 의장이 주장한 정관 개정의 필요성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이를 잘 조율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으며, 의료계 지도자들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의료 정책 위원회’와 ‘보험 정책 위원회’의 필요성
원래 의협 조직과 업무는, 정관과 규정에 따르면, 회무의 대부분은 상임이사에 의해 추진되며, 각각의 상임이사는 총회에서 수임 받은 사항에 따라 그 업무를 추진하게 된다.
그래서 추진하고 있는 내용을 매주 열리는 상임이사회에 보고하고, 주요 결정 사항은 토의 안건으로 제출하여 상임이사회에서 심의한 후 의결하도록 되어 있다.
즉, 각각의 상임이사는 독립된 추진 기구이며, 협회 사무처는 이 업무를 보조한다.
또, 각 지역, 직역의 입장을 듣고 주요 업무의 추진 방향을 정하기 위해 각각의 상임이사가 위원장이 되고 각 지역, 직역의 해당 상임이사들이 위원이 되는 독립된 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
회장은 회를 대표하고, 상임이사를 선임하고 회의를 주관할 뿐 실무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노 전 회장은 모든 주요 업무를 스스로 추진하려고 하면서 독단적 결정을 수 차례 반복한 바 있다.
노 전 회장이 가장 크게 잘못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
협회 업무 구조가 이렇게 상임이사 위주로 구성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편, 현 정관과 규정에 따라 업무 추진 방식은 20년 이전에는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방식이었으나, 현재의 회장 선출 방식과 정부와의 갈등, 급박하게 바뀌는 의료제도, 보험정책에는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지난 10여년간 협회 업무 추진의 결과를 볼 때, 빈번한 상임 이사 교체로 인해 업무의 연속성이 떨어졌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장기 정책을 정해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번 정관 개정을 통해 이를 보강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사실 이 같은 필요성은 이미 언급된 바 있어, 지난 97년 상근부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책협의회” 운영 규정을 마련하여, 주요 회무계획과 정책 개발을 하도록 한 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명무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협회의 장기 정책을 꾸려가는데 매우 중요하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화되지 못한 것은 각 집행부들이 그 같은 위원회를 구성할 경우 자신의 업무 영역을 침범한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번에 정관 개정을 하게 될 경우, 업무 추진은 현행과 같이 소관 상임이사들이 하더라도 협회의 주요 정책 개발과 그 아젠다 구성을 위한 별도의 의결 기구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즉, 가칭 ‘의료 정책 위원회’와 ‘보험 정책 위원회’를 따로 두고, 이 위원회를 의료계 내의 의료 정책과 보험 정책에 대해 내공이 깊은 회원들과 각 직역, 지역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인사들로 구성하여 그 안에서 주요 의료 정책과 보험 정책 방향을 정하고 이를 장기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 집행부 임기와 무관하게 장기간 위원회를 이끌도록 하여 정책 개발과 추진의 연속성을 갖도록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보험의 경우, 집행부 보험 이사 중 1인은 이 위원회의 위원이나 위원회가 추천하는 인사로 임명하여 건정심에 오랫동안 관여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비대위와 새로운 집행부가 해야 할 일
지난 임총에서 의결된 비대위는 투쟁을 이끌고, 새로운 집행부는 협회 고유 업무를 담당하여야 한다.
우리는 늘, 정부에 대해 의료계의 어려움을 알아달라고 하고, 정책 개선을 요구하지만, 늘 피상적 현안에 대해서만 주장할 뿐,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고 정책 제안을 하지 못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도 늘 같은 자리에서 맴 돌 뿐이다.
차제에 비대위가 주축이 되어, 이 작업을 해야 한다.
정책 대안을 만들고, 이를 회원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반면 지난 노 전 회장이 이끈 투쟁의 가장 큰 문제점은 투쟁 아젠다를 노 전 회장이나 소수의 몇 명이 결정하고 회원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전쟁의 명분이 중요하듯 투쟁의 명분도 중요하다.
투쟁은 회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이 하는 것이며, 회원들은 왜,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지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쟁 아젠다 선정을 위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전체 회원이 참여할 수 있는 토의와 숙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이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렇게 투쟁 아젠다가 결정되면, 이를 교육하고 숙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즉, 투쟁 아젠다는 상향식으로 결정하고, 이 아젠다에 대한 교육은 다시 하향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협회는 중앙회인 의협을 중심으로 지역적으로 시도의사회, 시군구의사회, 반회로 이루어진 조직망이 있고, 직역으로는 전공협의회, 공보의협의회, 교수협의회, 의학회, 병원의사협의회, 개원의협의회, 각과 개원의사회 등으로 세분되어 있다.
이처럼 씨줄과 날줄로 만들어진 전체 조직을 가동하여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수 백 명이 모인 회의체에서 투쟁 아젠다를 선정하여 제출하고, 이 아젠다가 비대위에서 결정되면, 다시 이 조직체들을 통해 교육하고 숙지하도록 하여 투쟁에 대해 한 마음, 한 뜻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1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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