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달라”고 약속해 달라는 건, 구차하지 않은가.


일본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달라”고 약속해 달라는 건, 구차하지 않은가.


박명림 교수는 컬럼을 통해 다음 다섯 가지 사항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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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진상규명이다. 한·일 두 정부나 국제기구에 의한 공동 진상조사와 보고는 있었는가?

둘째, 국제법적·인도적 전쟁범죄의 공식 인정과 사과가 있었는가?

셋째, 보상과 배상은 있었는가?

넷째, 인류가 함께 기억할 추모시설은 건립하였는가?

다섯째, 재발 방지 약속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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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한 일본 작가의 책이 발간되고, 그 책이 한글로 번역 되어 알려지게 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위안부이었음을 고백하는 할머니(김학순)가 나타나기도 했고, 그 작가의 강연이 불을 당기면서 한일간의 외교문제화된 것이다.

이에, 일본 수상은 진상 조사를 약속했고, 한국측에 제공한 16명의 위안부의 진술을 토대로 조사가 이루어져 1993년 고노 담화가 발표되었으며, 이와 별개로 1992년 우리 정부의 <일제하 군대 위안부 실태 조사>가 이루어졌고,

유엔 인권위원회는 스리랑카 인권 변호사인 라디카 쿠마라스와미가 1995년부터 2002년에 걸쳐서 조사한 「여성에 대한 폭력, 그 원인과 결과에 관한 특별 보고서」라는 명칭의 수십 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제출되어 채택하였다.

또, 1998년에는 게이 맥두걸이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일명 <맥두걸 보고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했으며, 유엔 국제법률가위원회는 94년 11월 ‘위안부-끝나지 않은 시련’ 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미국 정부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2000년부터 8년에 걸쳐 "1998 년 나치 전쟁 범죄 공개법" 과 "2000 년 일본 제국 정부 공개법" 에 근거하여 독일과 일본의 전쟁 범죄의 재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부시 대통령은 2007년 4월 무려 14만2천 페이지에 달하는 일본 전쟁 범죄에 대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였고, 그 해 6월 미하원은 "종군 위안부 문제의 대일 사죄 요구 결의"를 채택한 바 있다.

또, 국제 인권단체들의 주도하에 <여성국제전범법정(The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을 열어 9 개국의 검사팀이 위안부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제출했으며 2001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200 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이 발표되었다.

이 재판은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물론 이 재판은 민간재판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위안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조사는 박영림 교수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심도있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거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조사는 여성가족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진술도 모두 공개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같은 국제 사회의 위안부 조사는 우리나라 정부와 학자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이루어 진 것들이며, 한편으로는 우리 한계를 넘어서는 조사라고 할 수도 있다.

만일, 그래도 또 조사를 해야 한다면, 그 많은 위안부를 모집해 넘긴 한국인 뚜쟁이 들에 대한 조사를 병행해 보자.

오히려 일본에서는 이 뚜쟁이들의 양심 선언이 나오는데, 무려 20만명의 한국인 위안부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단 한명의 뚜쟁이 혹은 모집업자, 조력자가 없으며, 처벌받은 바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둘째 의문 중 전쟁 범죄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범죄는 막연한 피해의식과 상상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형법적 죄는 성문화된 법과 국제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를 죄형법정주의라고 한다.

전쟁 범죄는 <전시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시 국제법은 제네바 조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패망 당시 시기적으로 제네바 조약에 따른 전쟁 범죄 처벌은 어려웠으며, 일본의 전쟁 범죄는 포츠담 선언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화민국(지금의 대만), 소련 (러시아) 등 4 개국은 독일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전후 일본 처리에 대해 논의 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선언을 묵살하자, 8월 6일과 9일에 걸쳐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고, 이에 일본 군부는 항복을 결의하고 8월 10일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다. 이후 내분으로 번복을 거듭하였다가 최종적 항복했고, 8월 14일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 것이다.

포츠담 선언 제 10조는 포로를 학대한 자를 전범으로 엄중히 처리한다고 규정한 바, 일본이 이를 준수하겠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근거로 군사 재판을 열어 전범으로 28명을 기소하여 처벌하였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수천만명을 공포와 고통 속에 떨게 한 죄값으로는 터무니 없지만, 그랬다.

여기서 또 생각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 (혹은 대동아 전쟁)은 일본과 연합국 간의 전쟁일 뿐이며, 우리나라는 일본과 싸워 승리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1910년 일본과 합병된 상태이었으며, 비록 통치이념이며, 우리 시각으로는 민족말살 정책이었지만, 내선일체란 구호 아래, 표면적으로는 일본인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식민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한반도에 사는 나라없는 백성들은 일본 여권을 발부받고, 일본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인과 함께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1951년 연합군과 동남아 국가 48 개국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논의할 때 초대받지 못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고, 서방의 일원으로 자리 매김 했으며, 대다수 나라들이 전후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된다.

당시는 한반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고, 극동 아시아에 미국의 안전한 발판을 만들 필요가 있었으므로, 동남아 국가들의 배상 청구는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세번째 의문, “보상과 배상은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서 이어진다.

언급 했듯이 일본과 전쟁을 한 바 없는 우리에게 전쟁 배상 청구권이 있는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만, 식민지 지배에 따른 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을 뿐이다.

실제 해방 이후 정부는 일본에 배상에 대한 협의를 전개했고, 일본은 개개인에 대해 배상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 정부가 배상 청구를 할 경우 그 금액이 클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가 모두 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주장했고, 결국 협상을 결렬되었다.

박명림 교수는 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을 덮으려 반공을 앞 세웠다고 주장하지만,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기조는 반공, 반일이었으며, 일본과의 수교를 거절하고, 철저한 반일 노선을 주장했다. 독도로 일본과 갈등을 빚자, 임의로 평화선을 그어 세계를 놀라게 하고, 미국의 반대를 묵살한 체, 이 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무작위로 나포했다.

이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기까지 나포한 일본 어선만 300 척이 넘는다.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일제 식민지 하에 경찰과 관리를 중용한 건, 그나마 고등교육을 받고 행정 업무를 할 수 있는 인원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좌익을 배제 하려는 의도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좀 배웠다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참신한 신사조였고, 유행이었다.

그렇다고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을 했다는 건, 개가 웃을 이야기이며, 박영림 교수 현실 인식 수준을 가늠케 한다.

아무튼 혁명 정부가 들어선 후 일본과 기본조약을 맺으면서 박정희 정권은 대일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고 경제 협력을 약속 받은 바 있다. (그렇다고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할 생각일랑 마시라. 당시 일본의 경제 원조가 없었다면 포철도 없고, 현대 자동차, 현대 조선도 없었으며 오늘 날의 대한민국도 없었다.)

일본은 이 협정으로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일각에서는 한일기본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일본 정부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주장하며, 이 논란은 법정에서 다투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실효성이다.

개인이 일본군 혹은 일본 정부의 불법적 행위로 인해 피해를 받았음을 입증하고 그 피해 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있다. 그 배상을 주장하며 시위하고 집회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번 한일 협상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 소송과 주장, 시위를 막을 도리도 없으며, 막을 이유도 없다. 또 그것이 협상을 위배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이것은 국가간 협상일 뿐, 피해자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 추모 시설은 건립하면 되며 이것이 핵심적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또, 재발 방지 약속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위안소 건립, 위안부 강제 징집은 모두 군을 상대로 한 것이며,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전쟁이 나지 않으면 된다.

재발을 막으려면 우리가 힘을 길러, 우리 누이를 보호할 수 있으면 된다. 힘없이 일본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달라”고 약속해 달라는 건, 구차한 일이지 않은가.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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