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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일본 정부 사과의 의미>





<일본 정부 사과의 의미>


이번 한일 외교 장관 회의 후 일본이 발표한 사과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우선, 이른바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갖아야 할 것은 분노 뿐만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어야 할 이유가 있다.

첫째, 일각에서 주장하듯 일제 시대에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수 천명(?) 강제로 납치, 위안부로 연행 되었다면 당시 이를 방치한 그 가족은 물론, 언론, 식자들, 국민들은 물론, 이에 대해 50년 넘게 침묵한 정부와 국민들 모두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 된 것은 국내 시민 단체나 정부, 학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부끄러워 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수십년 넘게 방치 되었다가 일본인 작가에 의해 이슈화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일본의 인정과 사과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공창 제도나 매매춘의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위안부 문제에 자발적 위안부 (생계 등 경제적 이유 혹은 어떤 이유로든 매춘을 할 것을 알고 스스로 위안부로 나간 경우)를 포함시키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위안부를 삼기 위해 일본 정부나 일본군이 개입하여 강제로 납치, 연행하여 조선의 처녀를 위안부로 삼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 보려면, 지금의 시각이 아니라, 그 당시의 정세와 매춘 행위에 대한 인식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에는 공창 제도가 있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공창 제도는 창녀를 고용하여 공개적으로 영업하는 매매춘 행위를 말한다.

이 경우 영업 허가를 받거나 국가 혹은 국가 조직이 이를 관리하였는데, 이처럼 제도권에 속하지 않는 매매춘 영업을 사창이라고 부른다.

근대적 의미의 공창 제도가 본격화된 건, 나폴레옹 전쟁 당시이며, 일본의 경우 1872년 <전근대적 매춘 행위를 근절시키고, 새로운 매춘 통제 정책으로 창기로부터 신고를 받아 제한된 구역 안에서 생업을 위한 영업을 인정한다>며 공창 제도를 도입하였다.

공창 제도는 대개 전쟁과 함께 부흥하는데, 이는 프랑스나 일본은 물론 영국,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전쟁이 발생하면 다수의 젊은 남자들이 집단 생활을 하게 되고, 생명의 위협과 함께 불안감, 좌절감 등에서 벗어나려는 심리가 강하고,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을 찾기 마련이다.

게다가 전장(battle field)은 치안이나 규율이 엄격히 적용되기 어렵고 특히 점령군의 경우 더욱 더 그러하다.

그래서 주둔지 인근에서는 강간, 폭행, 살인 등의 행위가 빈번한데, 군이 공창 제도를 적극 도입한 이유는 이 같은 강간 등의 범죄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사실은 군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매독과 임질 등 성병으로부터 군대를 보호하기 위해 <통제 가능한 공창제도>를 도입 함으로 전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미국은 1910년에 이르러 공창 제도를 폐지했지만 여전히 군부대 주변의 매매춘은 성행하였으며, 이 같은 관행은 베트남 전쟁, 미군의 한국, 필리핀 주둔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일본 패망 이후 40만명이 넘는 연합군이 주둔한 일본에서는 연합군에 의해 자행되는 강간, 살인, 특히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 등을 막기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 위안부가 다시 모집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군 주둔지 일대에 소위 “양공주”라고 불리는 매춘부들의 매춘 행위가 있었고, 매춘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을 상대로 하는 매춘 행위의 단속은 상당 기간 제외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은 일본의 위안소를 본 따 유럽과 동남아 국가에 매춘부를 모아 위안소를 설치한 바 있으며, 1941년 육군령에 따라 군의 매춘 행위를 중지시키라고 하였으나 여전히 매춘은 묵인 되었고, 미국 국내의 여론에 따라 1944년에 이르러 비로소 공식적인 위안소가 폐지되었다.

1,2 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이태리, 독일 등은 모두 미국과 유사한 형태의 공창 제도를 유지했으며, 이들이 공창 제도를 유지한 이유는 모두 성병 전염에 따른 전력 약화 방지가 그 이유였다.

공창 제도, 매매춘, 위안부에 대한 당시의 문제 의식이 매우 옅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금의 시각으로 재단할 수 없음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창 제도는 사실상 노예제와 다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매매춘 행위는 사실상 인신매매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가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건, 일본인 작가 요시다 세이지가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이란 제목의 책을 발표하고, 1982년 강연을 통해, “제주도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사냥하듯 일본군이 조선인 처녀를 포획, 납치, 연행했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나서이다.

요시다의 주장은 아사이 신문에 의해 10여 차례 연재 되었고, 이 같은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파장이 일었고, 비로소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표면에 떠 오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사이 신문은 1992년 미야자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 직전, 위안소 설치에 일본 군이 개입되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다시 실었고,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의 주요 이슈로 떠 오르게 된다.

이로 인해 반일 감정이 높아지자 미야자와 총리는 사과와 진상 규명에 대한 약속을 하였다.

이후 산케이, NHK, 제주 신문 등이 요시다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취재를 하였고, “남자들의 징용은 있었으나, 여자 사냥을 없었다.”는 제주 주민의 증언을 보도하기도 했다.

요시다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비판적이었으며, 1995년 요시다는 결국 자신의 책과 강연 내용이 픽션이라는 내용의 진술을 하였고, 요시다의 주장을 기사화했던 아사이 신문은 1997년 요시다의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다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여론은 확산되어 갔으며, 2006년 미 하원은 <대일비난 결의안> 채택 했으며, 유엔은 1996년 보고서에 요시다의 증언 즉, 일본 군부가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위안부를 연행해 갔다는 내용을 증언으로 채택하였다.

이 같은 배경과 일련의 과정 속에서, <조선인 위안부> 논쟁의 핵심은,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조선인 위안부를 징집하는 과정에 일본 정부 혹은 군부의 개입과 강제성이 있었느냐로 모아질 수 있다.

이제까지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부인해 왔으며, 수 많은 일본인 위안부처럼 조선인 위안부 역시 자발적으로 참여했거나 민간 뚜쟁이에 의해 모집되어 보내졌다는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담화를 통해, 일본군이 개입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사죄를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 깊은 위안부의 명예 상처 입은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총리대신으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갖고 상처입은 분들에게 마음으로 부터 깊은 <사죄를 표명>한다.”

이 뿐 아니라, “위안부 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겠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발뺌을 하고 책임을 회피 했던 가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책임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자백한 것이다.

위안부들의 한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혹은 누군가에게 속아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납치 연행되어 치욕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일본군이 개입하여 강제로 그랬음을 인정 하였다면, 위안부들의 분노와 한은 다소간 수그러들어야 마땅하다.

일본 정부의 자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노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첫째, <일본 군의 개입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에 대한 한이 아니라, 자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위안부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한을 가지고 있거나,

둘째, 위안부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 논쟁을 종결시키지 않기 원함일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위안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때 우리나라는 미국을 상대로 하는 매춘이 묵인 되었고, 그 수가 많게는 100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었다.

소위 <양공주>로 불리던 매춘의 상당수는 자발적이었고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만일 일제시대의 자발적 위안부에게 일본 정부가 배상을 해야 한다면, 같은 논리로 <양공주>들 역시 미국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

또, 다른 이유로 위안부 문제를 계속 이슈화하여 반일 감정을 고취시키는 것이라면, 매우 경계해야 한다.

친일파 척결, 반일 등의 끝은 김일성의 주체 사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북괴가 남한 정부를 폄훼하며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괴의 선명성을 드러낸 것이 친일파 척결, 반일 문제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과거를 잊지 말자.

그러나 과거에 얶매여 스스로 발목을 잡혀서도 안 된다.

일본이, 군부가 위안부 문제에 개입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사과한 것의 의미는 작지 않다.

이 의미를 왜곡하고 호도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사과를 받아낸 현 정부는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다.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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