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임금님 상소문?











청와대 국민 청원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30일간 20만명이 추천한 청원은 청와대가 답한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25만건 이상의 청원이 접수되었고, 이 중 청와대가 답변한 청원은 단 41개이다. 즉, 국민의 물음에 0.016 %의 답변이 있었을 뿐이다.

국민 청원은 관련법이 없다. 즉, 국민이 얼마나 청원해야 답을 하는 건지 법으로 정한 근거는 없다. 또 반듯이 답을 해야한다는 법도 없다. 즉, 법에 근거해 국민청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국민청원은 미국 백악관의 "We the People" 이라는 프로그램을 본따 만든 것이며, 운영 구조는 거의 차이가 없다.

다만, We the People 은 청와대보다 적은 10만명이 추천하면 백악관은 60일 안에 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와대 국민 청원이 채택되어 답변이 달린 것들을 보면, 법이 바뀌어야 청원을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청와대가 임의로 결정해 추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서울 시청광장에서 개최된 퀴어 행사를 반대한다는 청원에 대한 청와대 답변은 '서울시 행사이므로 청와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였다. 생각해보겠다거나, 협의해보겠다가 아니라,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가 답이었다.

게다가 법을 개정해야 추진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청와대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답변이 '관심을 가져보겠다', '그렇게 할 수 있게 추진해 보겠다'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나라는 '짐의 말이 곧 국법이니라'고 할 수 있는 왕국이 아니며, 대통령은 국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돌아가며, 법이 부당하면 위헌 소송을, 헌법마져 부당하다면 개헌을 통해 고쳐나가야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와대 국민 청원은 국민들과 소통하겠다는 대통령의 정치 철학을 반영한 것일 수는 있으나 나쁘게 말하면, '짐의 말이 곧 국법'이라고 착각하게 하고, 대통령이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듯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 반문할 것이다.

미국도 같은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럼 미국 대통령도 국왕 노릇하며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냐?

미국도 비슷하다. 다만, 미국이 우리와 다른 건, 미국 대통령은 실정법과 같은 효과를 갖는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은 행정명령(Exeutive Order)을 통해 미 의회가 입법하지 않은 사항을 법에 준해 행정기관이 집행하도록 할 수 있다. 즉, 왕은 아니나 왕보다 더 한 권력을 가진 것이 미국 대통령이다.

그러나 실제 오바마 대통령이 실제 청원을 집행하기 위해 행정명령을 발동한 바는 없는 것 같다.

왜 오바마 대통령이라고 하냐면, We the People 은 오바마 대통령 취임 후인 2011년 9월에 시작된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말, 이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 역시 이 페이지를 개설한 후 조건이 충족된 청원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제도 시행 2년 후, 워싱턴 포스트는 조건 충족 (30일간 10만명 추천) 후 240일이 지났으나 여전히 답변하지 않은 30여건의 리스트를 게재하기도 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We the People 이나 청와대의 국민청원을 딱 잘라 포퓰리즘의 전형이라고 단정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미국의 경우, 전혀 무효했던 건 아니다.

2013년 초, 스마트폰의 유심 락 (Country or carrier lock)을 해제해 달라는 청원이 있었는데, 이 청원은 미 백악관이 아니라, 의회에서 받아들여 소비자가 원할 때 무상으로 락을 해제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기 때문다.

그 전에는 미국의 대표적 통신사인 버라이존과 AT&T 모두 이동통신사를 갈아탈 수 없도록 캐리어 락을 걸어두고 이의 해제를 요구할 경우 까다롭게 굴거나 비용을 요구해왔다.

결론은 이거다.

국민 청원은 전가의 보도도 아니며 임금님 상소문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의협이 국민 청원 하나를 밀었다.

추천자 20만명 목표 달성을 위해 UCC를 제작해 배포하고,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통해 독려하는 한편, '청와대 국민청원 고함 릴레이 프로젝트'라는 기묘한 것을 추진했다.

고함 릴레이는 다섯 글자의 구호를 정해 청와대와 전국민을 향해 '고함'치고, '데시벨'을 측정해 수치를 인증 사진으로 찍어 게시판에 게재하는 것이었다.

현재 이 게시판에는 10건 게시물이 있고, 그 중 인증 사진은 7개가 전부이다. 수치로만 보면 망한 프로젝트이다.

20만명 목표 달성도 실패한 체, 청원은 최근 종료되었다.

그 청원은 '철저한 조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7월 1일 발생한 익산 모 병원 응급실 폭행 사건 가해자 조사에 대한 것이다.

그 가해자를 강력히 처벌해달라거나, 재발을 막아달라는 게 아니라, '철저히 조사해달라'는 것이 마치 임금에게 상소하듯 청원한 내용이었다.

정작 그 가해자는 사건 5일만에 구속되었다.

이미 가해자는 구속되었는데, 철저히 조사해달라는 청원 추천인 모집에 왜 그리 열을 올렸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2018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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