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속이지 말자



Assassination of Franz Ferdinand and his wife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 후 시작된 1차 세계 대전은 1918년 말 끝났다.

1차 세계 대전은 나폴레옹 이후 100년 만에 유럽 전역을 휩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은 세계 대전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유럽 대륙에 국한된 전쟁이었고, 제국들의 전쟁이었으며 그 결과 유럽의 제국과 왕정이 몰락하기 시작했고, 헝가리, 핀란드,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체코슬라바키아 등이 독립하였다.

이들 국가의 독립은 1918년 초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의회에서 발표한 '14개조 평화 원칙 (Fourteen Points)' 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개조 평화 원칙 (Fourteen Points)'에는 벨기에를 필두로, 이태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루마니아, 터키, 세르비아, 폴란드 등에 대한 전후 처리 즉, 독립 및 국경에 대한 기본 처리 원칙이 담겨있다.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이 14개 평화 원칙을 발표하면서 민족자결주의(The right of a people to self-determination)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National aspirations must be respected; people may now be dominated and governed only by their own consent. 'Self determination' is not a mere phrase; it is an imperative principle of action.

(국가의 열망은 존중되어야하며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만 지배되고 통치될 수 있다. '자기 결정'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행동의 필수 원칙이다.)


한 마디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란, 각 민족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운명을 정하고, 타민족이나 국가에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때 미국이 민족자결주의를 꺼낸 건, 유럽의 제국들 특히, 적국의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독립한 아시아 국가는 없지만,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영향을 받았다.

왜냐면 이 소식을 전해들은 동경의 유학생들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조선에도 적용해 달라며 1919년 2월 8일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3. 본단은 만국 평화 회의에 민족 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2.8 독립선언서 결의문)



1919년 3월 만세 운동이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한데, 돌이켜보면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왜냐면, 일본은 영국과 동맹국이었고, 영국은 1 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으며, 민족자결은 패전국에 해당할 뿐, 승전국 진영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제 사회는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독립을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 운동의 또 다른 배경은 쌀값 폭등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일본은 심각한 흉년이 들었고, 모자란 쌀을 조선에서 가져갔다. 쌀을 강제로 빼앗아 간 것(수탈)은 아니다. 돈을 주고 사갔다. 물론 제 값을 치뤘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면서 공급량이 준데다 일본 자본의 쌀 투기 바람이 불면서 쌀값이 서너배 뛰게 되었고, 쌀값 폭등으로 불만이 축적되었다.

1910년 조선의 강제 합병 후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쌀값 폭등에 따른 민생고에 시달리게 되자 드디어 민심이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건 고종의 승하였다. 고종황제는 평소 야참으로 즐며 마시던 식혜를 마신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시중에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임금이 독살되었다는 소문, 일제 합병 이후 삶이 더 고단해졌다는 사실, 1차 세계대전 이후 요동치던 국제 정세 등이 맞물린데다가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 발표 등이 3.1 운동을 촉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경 학생들의 독립 선언문을 접한 천도교 (동학 정신을 계승한), 개신교, 불교 등의 종교 지도자와 민족 대표를 자청한 이들은 독립선언문을 만들어 전국적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만세 운동을 실제로 주도한 건, 민족대표 33인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이었고, 거기에 민중이 대거 가세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한 탑골 공원에 가지 않고, 태화관으로 모였다. 태화관은 기생이 나오는 고급 요정이었다. 거기서도 독립선언문 낭독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선언문을 나눠 갖고, 만세 삼창 후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한일합병은 임금이 나라를 지키고 통치할 역량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략적으로 일본에 고스란히 가져다 바쳤거나, 아니면 강압에 의해 피눈물을 흘리며 넘겨줌으로 성립되었을 것이다.

합병으로 조선의 민중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었고, 그 상실감과 울분으로 자결하거나 통곡한 이들도 많았으나, 대부분의 민중에게 달라질 건 없었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근대화의 물결이 더 큰 충격으로 와닿았을 수도 있다.

3.1 운동은 국내적으로 조선 민중이 식민지에 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하고, 독립해야 한다는 염원을 심어 준 계기가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반도에 사는 조선인들이 일제 통치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었고, 중국, 대만, 인도 등에도 영향을 주어 같은 해 중국에서는 본격적 항일 운동인 5.4 운동이 발발하기도 했다.

3.1 운동은 그 과정이나 배경이 무엇이든, 조선 반도에 사는 민중들의 머리를 각성시켜 준 것이며,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3.1 운동이 계기가 되어 우리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수많은 독립군이 있었고, 열사, 의사들이 피를 흘렸고, 청춘을 바쳤지만, 그것으로 독립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독립할 수 있었던 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며 미국에 싸움을 걸었고, 미군이 무수한 희생을 치루며 일본을 압박하는 동시에, 원자탄으로 일본 본토를 공습함으로써 일본이 패전을 선언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건 부끄러운 일이나 그렇다고 속일 수 있는 과거도 아니다. 20 세기 이후 수 많은 주권 국가들이 출현했지만, 힘으로 독립을 이룬 나라는 많지 않다.

그래서 난 우리나라 대통령이 오늘 연설(경축사 전문 링크)한 다음의 구절에 동의할 수 없다.

"광복은 결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선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싸워 이겨낸 결과였습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힘을 모아 이룬 광복이었습니다."

아무리 이렇게 자위한들,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8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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