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파업 선언을 바라보는 시각
사실, 파업이라기 보다는 집단 휴진 혹은 휴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물론, ‘난 전공의 혹은 봉직의이므로 파업이 맞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소속된 병원이 잠정 휴업을 하면 자연스럽게 휴진하는 것이니 이 역시 파업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 물론, 병원은 문을 열어두는데 그 자신만 파업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파업이라고 불리고 싶어하고, 그렇게 부르니 파업이라고 하자.
첫째, 과연 파업할까?
알려지다시피, 파업은 결정되었다. 그것은 투표 (의협 주장)라고 해도 좋고 설문조사 (어느 친 노환규 인사)라고 해도 좋은데, 아무튼 파업 강행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니, 예정대로 파업을 하는 것에 대한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과연 파업할까?
이런 의문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생각일 뿐, 초 치고 기운 빼자는 얘기는 아니다.
이미 노회장이 취임한 이후 크게 두 번에 걸쳐서 반복되었던 일들이 데자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업 결정 후 파업까지 “무려” 10일이 남았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하루 저녁에도 일방적으로 파업이 취소되었는데, 10일이란 시간은 천지창조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둘째, 파업은 효과적일까?
파업에 돌입했다고 치고, 과연 그 파업은 파급력이 있을까?
얼마 전 북한이 미사일 4발을 발사했다. 그 소식을 듣고, 옆에 있던 외국인에게 북한이 미사일을 쏜 이유를 아냐고 물어봤다. 그는 당근 모른다며, ‘혹시 한국에 전쟁나는 거야?’라며 걱정스런 표정을 짖는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미사일의 제작 유효기간이 끝난 거다. 어차피 폐기해야 하니까, 괜히 한번 쏴 본거다.’
물론, 한국에 전쟁 날 일 없으니 걱정 말라는 취지의 농담이었다.
칼은 품에 있을 때 무서운 것이다.
품에 손을 넣고 칼을 꺼낼까 말까 하며 겁을 주면 두렵지만, 막상 꺼내 들면 별로이다.
파업이 모든 의료기관의 전면적 파업이 될 가능성은 사실 별로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파업을 반대하는 의사들도 꽤 있는데, 그들의 반대 이유는 파업의 대의명분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파업은 전쟁만큼이나 대의명분이 중요하다. 의사, 특히 개업의에게 파업은 명줄이 달린 일인데, 목숨을 걸려면, 그에 상응하는 명분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번 파업의 명분은 의료민영화 반대, 원격의료 반대이다(물론 다른 내용도 있지만). 원격의료는 그렇다쳐도 의료민영화가 목숨을 걸만큼 위협적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는 의사는 많지 않다.
게다가 원격의료 역시 원격의료 그 자체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한데, 원격의료 도입으로 지역 기반이 붕괴될 것을 우려하는 개원의 외에 나머지 의사들 중에는 원격의료 도입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실제, 원격의료를 도입해 시행하는 많은 나라에서 원격의료가 현재의 대면진료를 실질적으로 위협한다는 사례는 찾아 보기 힘들다.
즉, 원격의료 도입에 대한 의학적 철학적 판단을 차치하고, 또 원격의료에 대한 감정적 이유를 모두 빼고 보면, 과연 그것이 주장되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악행일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 것이다.
즉, 파업이 위협적이고 효과적이려면,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인가가 관건인데, 빈약한 대의명분과 우왕좌왕하며 내부 갈등을 조장(?)하는 집행부의 처신이 파업 동참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업이 과연 위협적일까, 적어도 2000년 의약분업 당시와 같은 파괴력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셋째, 파업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파업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파업을 통한 협상력의 강화가 목적이랄 수 있다.
의정협의는 이미 있었고, 그 내용은 공동기자회견의 형태로 발표가 되었다.
노환규 회장은 그 공동 발표가 복지부의 조작이며 의협은 동의한 바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의 진위에 무관하게, 논의하였다는 내용이나 결과나 사실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즉,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협상 아젠다도 보이지 않으며, 다수 의사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를테면, “모든 국민들에게 재난적 의료비 지불 없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 (협의 내용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이 있다면, 이는 협의,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이번 협상 내용이라는 것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원론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협상이 없다면, 파업은 무의미하다.
다시 말하지만, 파업은 협상력 강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번 파업은 (설령 파업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저, 의사 사회에 내재된 불만과 불안의 PSYCHODYNAMICS를 해소하기 위한 한풀이 푸닥거리가 될 가능성도 크다.
또, 노환규 회장은 파업을 자신의 입지 강화와 불만 해소 책으로 사용할 공산이 크다.
넷째, 파업의 후폭풍은?
파업이 이루어지고, 그 강도에 따라 후폭풍은 달라질 것이다.
파업이 장기화되고 사회문제화되면, 누군가는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파업 이후 그 결과에 따라 내부적인 논란도 적지 않을 것이다. 노회장은 파업의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공언하였는데, 실제 노회장이 질 수 있는 책임은 매우 제한적이다.
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노회장이 질 수 있나?
파업으로 발생한 환자의 불편과 애로 사항을 노회장이 질 수 있나?
파업을 동참하고 강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계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도 책임 질 수 있나? 어떻게?
그러니 이 공언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이고, 그냥 센 척 해보는 이야기이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데, 파업이 무위로 돌아갈 경우, 노회장이 실질적으로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 자신이 의협의 수장이 되어서 보낸 2년이란 시간, 회원들에게 심어준 희망 고문에 대한 책임, 정작 중요하게 다루고 추진했어야 할 것을 하지 못해 생긴 collateral damage 등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금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도의적 책임은 져야 한다.
물론, 파업이 성공하고, 그래서 파업에 힘입어 강화된 협상력으로 다수 의사들이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가져 온다면, 그는 영웅으로 추앙될 것이고,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다.
심지어는 반노환규 정서를 가진 의사들 다수 역시, 설령 그에게 진심어린 존경심으로 머리 숙여야 할지라도 그런 성공적 결과가 있기를 염원할 것이다.
이제 막이 올랐다.
그 동안은 연습이었다.
무대 위의 배우가 어떤 동선을 그리던, 어떤 대사를 내뱉던 또 어떤 연기를 하던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노회장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파업을 이끌어 냈다.
그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그 자신이 연출자이며, 주연 배우를 자청했다.
뒤늦게 무대 장치와 조명, 조연과 엑스트라를 비난하며 무대를 망쳤다고는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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