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뉘앙스와 재벌




단어는 뉘앙스(nuance)를 갖는다. 뉘앙스는 그 단어가 갖는 의미의 그림자이다.
즉, 그 단어가 갖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불'이란 단어는 따뜻함을, '얼음'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문장에 독특한 뉘앙스를 갖는 단어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섞으면, 그 단어들의 그림자 속에 감춰진 이미지들이 화학 반응을 만들어, 그 문장을 퇴색하거나 화려하게 변신 시킨다. 그렇게 독자로 하여금 문자나 글자가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의 능력이고, 힘이다.

우리는 가족, 사랑, 아기, 연인 등의 단어에서 따뜻함과 안도감을 느낀다면, 어떤 단어들에서는 강한 거부감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도 한다.

이를테면, 친일파, 위안부 따위이다.
의사라면, 포괄수가제, 원격의료가 부정적 이미지의 단어들이다.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뇌리에 고착되어 어지간해서는 떼어내기 힘들다.

보통의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대표적인 단어는 '재벌'이다.

재벌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이지만 지금은 한국에서나 쓰이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Chaebol"이라고 쓰며, 위키피디아는 가족이나 일가친척으로 구성한 한국 특유의 복합기업이라고 정의한다.

재벌에 대해 쓴 재미있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 이 글은 중앙일보 중국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한우덕 씨의 글이다.

‘財閥(재벌)’이라는 한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 어원을 보면 그렇다. 글자 ‘閥(벌)’은 ‘門’과 정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伐(벌)’의 합성어다. 고대 중국에서는 군 장수가 싸움에서 이겨 돌아오면 축하 파티를 열곤 했다. 이때 문(門) 밖 왼쪽에 서 있던 공로 병사를 ‘閥’이라고 했고, 오른쪽 병사를 ‘閱(열)’이라고 했다. 지금도 ‘閥閱(벌열)’이라는 말은 ‘공로가 있는 가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門’ 안에 ‘伐’을 쓴 이유 역시 싸움과 관계가 있다. ‘伐’은 ‘人(사람)’과 ‘戈(창)’이 합쳐진 것으로 ‘칼로 목을 베다’라는 게 원뜻이다. 정벌(征伐), 벌목(伐木) 등으로 쓰임새가 발전했다. 결국 글자 ‘閥’은 ‘싸움에서 칼로 적을 여럿 벤 수훈 병사의 집안’이라는 뜻이다.

글자 ‘財(재)’는 재물을 뜻하는 ‘貝(패)’에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상태를 의미하는 ‘才(재)’가 결합됐다. 말 그대로 ‘돈을 벌고, 쌓아둘 수 있는 것’이 바로 ‘財’다. 이 ‘財’와 ‘閥’이 합쳐져 만들어진 ‘財閥’의 사전적 의미는 ‘돈을 벌어 쌓아둘 수 있는, 여러 분야에서 공이 많은 가족이나 집단’이 된다.

그러나 중국에는 ‘財閥’이라는 단어가 없다. 일본이 만든 말이다. 지금도 중국어 사전에서 ‘財閥’을 찾아보면 ‘19~20세기 일본에서 형성된 거대 금융그룹 집단’이라고 쓰여 있다. 스미토모·미쓰비시·후지쓰 등 당시 맹위를 떨쳤던 기업들의 구조가 일본 전통의 가족체제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말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오늘의 ‘재벌’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 식으로는 ‘대기업 그룹’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각종 특혜를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의 편중 현상이 심화되면서 ‘재벌’이라는 말에는 특혜, 독점, 비리 등 부정적인 의미가 가미됐다. 선거 정국이 되면 ‘재벌 개혁’이라는 말이 꼭 나오는 이유다.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다. 여야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내걸었고, ‘재벌 개혁’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대기업들은 분명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을 것이다. 균형 있게 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 시작은 그들을 ‘재벌’이 아닌 ‘대기업 그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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