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와 Ticom으로 본 병원전산화의 실체
EDI는 electronic data interchange의 약자로 전자문서교환을 의미하며, Ticom은 90년대 초 우리나라 최초의 주전산기이다.
이 둘은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다른 듯 닮은 구석이 있으며, 우리나라 병원 전산화 HIS(Hospital Information System)의 주요 요소가 되었던 바가 있다.
우선 타이컴.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호돌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타이컴은 당시 금성사(LG), 삼성, 현대, 대우 등이 합세해 만든 unix를 사용하는 미니급 서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정부는 외국산 주전산기가 시장을 장악하자, 국산 서버를 만들기로 하고, 주요 업체와 KIST에 요청하여 만든 것이 바로 타이컴이다.
1993년만 해도 유닉스를 사용하는 국내 주전산기 시장의 17%를 타이컴이 장악할 정도 (93년 판대 댓수가 243대. 당시 유닉스 사용 기종은 총 1,433대로 조사됨) 의 기세를 올렸는데,
사실은 공공기관이나 은행 등에 전략적으로 타이컴을 밀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공공기관 중의 하나가 바로 병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병원에 EMR은 커녕, OCS도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주전산기의 필요가 없었는데, 정부는 병원 전산화를 계획하고 일종의 시범 병원으로 전국에 산재한 지방 공사 의료원을 선택하였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공공기관에 타이컴을 밀어 준 건, 애써 개발한 주전산기를 누군가 써 주어야 그 성능을 평가받을 수 있고, 그래야 민간 기업도 이를 구매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리라.
이렇게 우리나라 전산 업계의 발전을 위해 처음으로 OCS를 사용하게 된 곳이 바로 지방공사 의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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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92년 국감에서 당시 국영기업인 한국통신은 신랄하게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전국에 설치한 광통신망에 대한 이용도가 현저히 낮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인터넷도 널리 보급된 상태가 아니었고, 통신 트래픽이 많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감에서 지적을 받은 한국통신은 부랴부랴 수익성 좋은 업종을 찾다가 눈독을 들인 곳이 또 의료계였다.
바로, 보험청구 EDI를 개발해 이를 각 의료기관에 보급하고, 청구 건당 돈을 받기로 한 것이다.
당시 EDI는 무역 EDI가 유일했는데, 무역 EDI의 청구건수는 미미한데 비해, 요양급여 청구 건수는 한 해 4억 건이 넘으므로 건당 100원만 받아도 400억원을 벌 수 있는 노다지라고 본 것이다.
당시 의료기관은 용지나 디스켓에 청구 데이터를 담아 청구를 했는데, 이를 광통신망을 이용한 EDI 청구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한국통신은 의협을 방문해 EDI 방식의 청구를 제안했지만, 의협은 이를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통신이 이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겠다는데, 의료기관이 그 비용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국통신은 우선 약국과 한의원을 중심으로 EDI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후 대형병원과 중소병원, 종국에는 모든 의료기관 까지 EDI를 사용하게 된다.
이렇게 EDI와 타이컴 즉 한국 컴퓨터 통신 업계는 의료계의 피를 먹고 자란 것들이다.
한편, 이들에게 수혈해 준 의료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IT 강국은 사실 미국이다.
그 미국의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앞에 두고,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진료하는 곳은 매우 드물다.
심지어, 여전히 대부분의 의사들이 종이에 수기로 처방전을 써 준다.
2008년 국립과학회(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는 막을 수 있는 약물처방 사고가 적어도 150만 건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 중 7천 건은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그 주요 이유가 미국 의사들도 한국 의사들만큼이나 악필이어서, 그 처방전을 본 약국의 약사가 처방전 해독(?)을 잘못 해 엉뚱한 약을 조제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200억불 (20조) 이상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서 전자처방전 발행을 유도하고 있는데, 이 전자처방전이라는 건,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대부분의 의사들은 손으로 챠트를 쓰고, 처방을 내리며, 수술 기록이나 진료기록을 녹음하고 전문 타이프라이터가 이를 문서로 만든다.
적어도 병원 전산화에서 만큼은 대한민국 같은 나라가 없는데, 그게 EDI와 타이컴에게 수혈해 준 덕분이라고 한다면 억측일까?
반면, 아마도 지금 우리나라 젊은 의사들은 컴퓨터 없이 진료가 아예 불가능지도 모른다.
만일 손으로 써서 모든 투약과 수액, 검사 항목에 대한 환자 입원 오더를 내라고 하면 하지 못할 의사들도 꽤 될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소위 <약속 처방>이라는 것으로 어지간한 처방을 묶어 놓고 그저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입원 처방, 수술 처방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컴퓨터 기기를 이용하면 진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지난 검사 결과를 조회하거나 진료 기록을 검토하는 것도 쉽고, X-ray 역시 요즘은 PACS로 보는 것이 필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 C&C가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의사와 환자 사이에 모니터가 끼어 있어, 환자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모니터를 쳐다보며 진료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OCS를 외래에서 사용하는 나라들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의사가 사무실 겸 진료실을 같이 쓰지 않고, 진료실을 따로 둔 다음, 미리 환자가 진료실에서 기다리면, 사무실에서 그 환자의 검사 결과 등을 확인하고 진료실로 들어가 진찰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 처방을 내고, 진료 상황을 기록하기도 한다.
진찰실에 있을 때는 오로지 환자에게만 집중하는 것이다.
초진의 경우에는 진료를 마치면 때로, 환자 앞에서 환자의 병력, 과거력, 진찰 소견 등을 모두 녹음을 하고, 녹음 도중 환자가 수정할 사항을 지적하면 그것을 그대로 모두 다 녹음하여 전문 타이프 라이터에게 보내 문서로 만들도록 한다.
원격의료가 입법화되면 지금의 병원 전산 환경에서 더 나아가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더 기묘하고 이상한 형태로 진화될 수 있다.
병원전산화를 주장하는 쪽은 병원전산화가 인력을 감축시킬 수 있고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병원전산화는 병원의 원무 부서와 심사, 청구 부서의 업무를 줄여주었을 뿐이고, 나아가 심평원의 비용을 현저히 줄여 주었을 뿐이다.
오히려 환자 진료 업무, 간호업무를 해야 하는 의료진으로 하여금, 병원 원무과 직원, 전산 직원이나 해야 할을 무더기로 안기고, 심평원의 빅 데이터 양산에 일조했을 뿐이다.
EDI와 타이컴을 사용하기 전, 심사 업무를 맡았던 당시 연합회에는 전국에서 날아오는 청구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하기 위한 전산 직원이 수백 명 있었다고 한다.
의사들이 전국의 외래, 병동 컴퓨터 앞에서 그들의 일을 대신해 주는게, 그게 병원 전산화의 실체이라고 하면, 지나친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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