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폐렴: 2월 6일. "사스의 교훈"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전임자는 후진타오이다.

후진타오는 등소평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2002년 11월 15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의 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공산당 및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는 전임자는 장쩌민이 차지하고 있었다. 반쪽짜리 권력이었던 셈이다.


좌에서 우로, 마우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11월 16일, 홍콩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광동성에서 괴질이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5명이 죽고, 의료진 105명을 포함해 305명이 감염되고 나서야 WHO에 이를 보고한다.

보고는 했지만, 중국 정부는 괴질의 정체를 철저하게 은폐하고, WHO 역학 조사관 역시 광동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두달의 시간이 흘러, 1월 31일, 생선을 팔던 한 감염자는 광저우의 병원에 입원해 병원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30명을 감염시킨다. 이중 한 명이 의사 Liu Jianlun 이었다.

감염자들을 치료하던 의사 Liu 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2월 21일 홍콩으로 가 시내 메트로폴 호텔에 숙박했다. 그가 묵은 객실은 911 호였다.


사스가 퍼진 메트로폴 호텔 9층 객실 개요도



도착한 날 가족들과 홍콩 시내를 둘러보고 그 다음 날 아침 스스로 인근 병원을 찾아갔다. 자신의 컨디션이 치료하던 환자들과 유사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병원에 입원한 그는 보름을 견디지 못하고 3월 4일 그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망한다.

Liu에 의해 메트로 폴 호텔에서 23 명의 투숙객이 감염되었고, 점차 전파되어 홍콩에서만 1,755명이 감염되고 299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80% 이상이 의사 Liu 에 의해 감염된 사람들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혼식을 위해 참석했던 의사 Liu 의 할머니는 캐나다 토론토로 돌아와 251 명을 감염시키고 자신과 아들을 포함해 44명이 사망했으며, 베트남으로 돌아간 투숙객은 30 여명의 병원 의료진을 포함해 63명을 감염시키고 5명이 사망했다. 그 외에도 투숙객들은 대만, 싱가폴, 필리핀 등의 감염자를 만들었다.

Liu가 전세계적 감염을 낳는 동안에도 세계는 이 질병의 정체를 몰랐다.

결국 3월 중순 홍콩에서 감염된 미국인 사업가가 사망하면서 WHO는 이 괴질에 대한 경고를 내놓았고, 이를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즉, SARS 로 불렀다.

사스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WHO의 전문가들이 사스 발생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4월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분노한 인민해방군 301병원 외과 군의관 장옌융 장군은 사스 창궐과 중국 정부의 은폐를 폭로하기 시작했다. 이미 북경과 상해에도 사스 환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장옌융 장군


장옌융 장군은 천안문 사태 당시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살상력이 큰 포탄을 사용한 것과 군 병원에서 사형수의 장기 매매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의 폭로로 사스 실체를 알게된 세계는 괴질을 은폐한 중국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중국인들은 분노하며 정부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정권이 위협받자, 후진타오는 뒤늦게 사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민심을 달래기 시작했지만, 이미 100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이후였다.

사스를 막아 낸 건, 중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의 의료진들이었다. 이들은 사선을 넘나들며 환자들을 치료했다. 중국 사스 감염자 5천여명 중 20%는 환자를 치료하던 중 감염된 의료진이었고, 다수가 사망했다.

그 중에는 암에 걸린 체 환자를 돌본 노령의 의사, 결혼식을 미루고 병원에 뛰어든 의사와 간호사 예비 부부, 100 일 넘게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하다 감염되어 사망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었다.

당시 북경에는 16개의 사스 지정 병원이 있었다. 이들 병원에서는 밀려드는 환자와 과로, 사스 감염으로 매일 40~60명의 의료진이 쓰러졌다.

그러나 이들이 쓰러지면 다른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앞다투어 자원해 자리를 메꾸었다.

이들마저 탈진할 때 쯤, 후진타오는 군 의료진을 투입했다. 군 의료진 투입이 늦어진 건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신경전 때문이었다.

후진타오는 투명한 정보 공개와 정면 돌파를 원했지만 장쩌민은 반대였고, 군 인민해방군은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장쩌민의 손아귀에 있었다. 민심이 들고 일어나자 그제서야 장쩌민은 군 투입을 허락했다.

다행히 사스는 6월을 넘기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후진타오는 사스를 기회로 장쩌민으로부터 주석 자리를 넘겨 받을 수 있었다. 사스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은 것이다.

사스는 중국내에서만 350여명의 희생자를 낳았지만, 중국은 선진화의 큰 한 걸음을 내딛는 계기를 갖는 것 처럼 보였다.

실제 후진타오는 사스 통제에서 보여준 리더십으로 중국을 잘 이끌었고, 성공했다.

중국의 의료 시스템에도 변화가 오는 것 같았다. 중앙집권식 온라인 전염병 보고 체계가 전국 병원에 설치되었다. 우한에는 최고 수준의 바이러스 연구소가 세워졌고, 사스 등 코로나바이러스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소의 Shi Zhengli 박사는 2005년 박쥐에서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를 검출해, 박쥐가 사스의 최초 숙주라는 가설을 증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Shi Zhengli 박사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우리는 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건 후진타오 뿐이 아니다.

당시 한국 대통령은 2003년 2월 말 막 임기를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이었는데,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사스 위기가 닥쳤지만, 정부는 사스 방어에 성공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사실 대통령이 잘 대응했다기보다는 행정의 달인라고 할 수 있는 고건 총리의 진두지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질병관리본부가 없었다.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복지부는 국립보건원을 통해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구축하려고 했지만, 공항 등 현장을 둘러 본 고건 총리는 한 부처의 힘으로는 방역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범정부종합상황실을 만들어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을 끌어들이고 부처 간의 업무 조종을 했다.





고건 총리는 '방역의 1차 목표는 국내 유입 차단'이라며 모든 부처의 대응을 주문하고, 의협, 병협 등 전문가 단체의 의견을 청취한 뒤, 사스 의심 환자의 10일 간 강제 격리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사스 방역을 전쟁처럼 치뤘다.

전국 242개 보건소가 사스 감염 위험지역 입국자 23만 명을 전화 추적 조사하고, 항공기 5400여 대, 선박 1만여 척의 탑승객 90만여 명에 대해 검역을 벌였고, 환자 접촉자 등 2200여 명을 자택에 격리했다. 군 의료진 70명이 방역에 투입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음압 격리실이 따로 없었던 시기이다.

그 결과 전세계에서 8천명이 넘게 감염되는 동안, 국내 사스 감염자는 단 3명에 그쳤다. 사망자는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스가 한참인 5월 경 중국 방문을 결정하고 7월 7일 방중했다. WHO는 7월 5일 사스가 통제되었다고 발표했다. 중국 정부의 사스 박멸 선언은 7월 말일이었으므로, 중국으로서는 전염병 지역을 방문한 외국 원수인 셈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환대하는 후진타오 주석



당연히 중국은 노무현 대통령을 대대적으로 환대해 혼밥할 일은 없었다.

적어도 노무현 대통령은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고, 적절한 타이밍을 노릴 운 혹은 실력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중국이나 한국은 퇴행했다.

중국 정부는 과거보다 더 정보를 통제하고 우왕좌왕하며 일을 키우고 있고, 한국 정부는 이도 저도 아닌 체로 국민이 위협받게 하고 있다.

양국 모두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거나 과거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한이 폐쇄된 1월 23일, 장하성 주중 대사는 '사스 때 어떻게 대응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2003년 일이라, 잘 모른다.'



2020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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